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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탈춤의 테두리 3.
기사 입력 2012-11-02 07:39:20  

3.
“1년전 어느 여름날인데… 그때 아마 새벽 한시는 퍽 넘었을겜다. 택시서 내려가지고 막 전세를 낸 아파트골목으루 걸어가는데 갑자기 어떤 남자 내 앞길을 턱 막아서는게 아니겠슴까. 우― 얼매나 놀랬던지. 정말이지 지금 생각만 해두… ”

생각밖에도 세면실에서 작동이 걸린 여자와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점심식사로 이어졌고 그녀 또한 이국풍이 짙은 레스토랑에 아담하게 술상을 갖추는 것으로 완전히 나를 은인 대우했다. “꿩 대신 닭”이라더니 그녀의 “은인”은 자리에 없고 내가 대신 등장한 것이다.

“글쎄 너무 당황하니깐 장딴지에 쥐가 막 나는데 그 무슨 영화에서처럼 쥬밍아(救命阿)하는 소리는 나가기는커녕 생각두 안납디다… 글쎄 그 남자 나를 꽉 끌어안구 입을 막 맞추고 가슴에 개발같은 손을 집어넣는데두 어쩌지두 못하구 덜덜 떨기만 하는데… 그때 마침 어디루 출장갔다 돌아오던 길이였다던(후에 들을라니까요.) 태국장님이 내 비명소리를 듣고 막 아부재기를 치며 달려오니까 그 남자 후닥닥 나를 뿌리치고 냅다 도망을 칩디다… ”

여자는 거기서 잠간 이야기를 끊고 한동안 추억이 어린 눈길로 창가를 응시했다. 맑게 개인 날씨였지만 집안에서 바라보고 있는 창가로는 장대비가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가슴 약한 손님들을 오래도록 비끄러매기 위해 알심 들여 설계해낸 인공강우, 거기에 톤이 낮은 색스폰의 잔잔한 곡조까지 동반하여 묘한 기분을 던져주고 있는 방안에는 언제 침입했는지 서늘한 침묵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노란 머리칼에 피부가 하얀 이국풍의 외국인 남녀가 조용히 맞은 켠 좌석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서 폭이 넓은 곳이래야 겨우 20여미터 안팎이라는 삼차하, 그 강 저쪽이 아내가 “노다지혁명”을 벌리고 있는 러시아라는 생각이 불쑥 뇌리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움마, 이 정신 좀 보쇼. 제 이야기만 제 이야기라고… 저 시장하시겠는데… ”
여자가 창가로부터 바삐 시선을 접으며 술잔을 건네왔다.
“아니, 괜찮습니다… ”
나는 금방 코앞으로 쳐들어온 여자의 굽 높은 술잔에 무의식적으로 내 술잔을 노크하며 언제부터 뇌리에서 궁싯거리고 있던 물음표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 여자… 도대체…)
아무리 “구명은인”과 일면목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분명 초면이고 또한 이성인데도 이렇게 허물없이 점심식사로 초대하는 여자의 “호방한” 행위가 슬그머니 불이 댕긴 내 의심에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지금 그녀를 요량하고 있던 저울추를 구경 어디에 놓아야 할지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긴 그녀가 청하자 바람 오늘은 한끼라도 길거리 음식을 피할 수 있고 또 어쩌면 만포식을 할 수 있다는 얄팍한 계산에 미적미적하다가 덜레덜레 따라온 것이 어찌 보면 알파가 붙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자요,”
그래서 술잔에 입을 대다말고 서먹거리고 있는데 여자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또다시 내 잔에 술을 치려고 했다. 그 바람에 나는 인사조로 사양을 하다가 급히 술잔을 내밀었고 다시 예절을 지킨답시며 술잔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러자 여자가 얌전히 허리를 숙여왔고 순간 내 눈앞에 여자의 불룩한 젖가슴과 그 사이로 비치는 살빛 어둑한 공간이 그림처럼 드러났다. “쿨룩, 쿨룩…” 금방 사레에라도 들린 것처럼 공연히 기침이 터졌다. 술잔에 담긴 노오란 액체가 가볍게 흔들렸다. “용강룡(龍江龍)”. 이 고장 명주. 여자는 이 술이 여느 술과는 달리 숙취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했다. 비틀비틀 과음이란 계단을 넘어가도…

나는 기침이 멎기 바쁘게 황급히 술잔을 비우고는 중얼거렸다.
“혹시 태, 태국장을… ”
“네?”
이상하게 화끈거리는 내 주의력을 다른 데로 전이하려는 속셈으로 무심코 던진 말에 여자의 두 눈이 올롱해졌다.
“저… 다른 뜻이 아니라 혹시 태국장하고 지금까지 아무 연락도 없었다는 말씀인가요?”
정녕 이처럼 사연 깊은 은인이라면 당연히 최신 버전의 연락수단을 간직한 돈독한 사이로 존재해야 할 게 아니냐는 내 표정에 웬일인지 여자의 표정이 의아해지고 있었다.

“그럼 선생님은 진짜로 태국장님의 친구분이 아니란 말씀임까?”
“제가요? 친, 친구라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친구는 아니고 그저 풋면목이나 좀…”
나는 극구 발뺌을 하며 송구한 기색으로 부자연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러자 여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호- 한숨을 내쉬더니
“그런걸 난 또… 근데 아까 그분이 사직하고 나왔다고 하시던데… 그건 왜서요?…” 하고 의문을 걸어왔다.

“저… ”
엉겁결에 말문이 막혔다. 그토록 잘 나가던 친구가 반년 전에 어이없는 일에 덜미를 잡혀가지고 “하해”라는 명목으로 하남성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히 입 밖에 번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허… 그냥 사직이겠죠 뭐. 다른 문제야 없을 테고.”
그래서 내가 우정 선선한 대답에 웃음을 가미하자 여자는 그게 진짜냐는 표정으로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직시하더니 왠지 믿겨지지 않는 다는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시탐조로 말문을 열었다.

“소문에 들을라니까 태국장이 사직한건 다른 문제… 때문이라… 던데요…?”
귀담아 들어야 윤곽이 잡힐 정도로 여자의 목소리는 불쑥 바닥을 기고 있었다.
“다른 문제요? 게… 무슨 문젠데요?”
속이 뜨끔해났지만 나는 전혀 내색을 내지 않고 휘둥그레 놀라움을 가장했다.
“무슨 문제요?”
내 얼굴에 시선을 박은 여자의 두 눈이 묘하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치잇~ 엉너리는!) 그런 표정이었다.

“여자 때문이라… 던데… ”
순간 살살 눈웃음치는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여자요?… ”
푹 고개를 숙인채 애꿎은 담배만 피워대던 친구의 모습이 부지중 떠올랐다.
“그래 맞아. 여자 때문이야… ”
“여자?”

“다음기 국장 인선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가서 보름이 지났을까… ㄷ시로 출장을 갔는데… 그날 저녁 술이 좀 과했어. 그래서 일찍 호텔에 들어왔는데… 샤와를 하고 나와 보니 웬 젊은 여자가 내 침대에 누워 있는거야. 벌거벗은 채로! 그야말로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지. 너도 알지만 나로 말하면 그때가 비상 시기고 또 나야 원체 길거리 여자에 대해서는 별로…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진짜 호미난방이었어. 화가 나지만 야단을 치면 소문이 날 것 같고… 그래서 한편으로는 얼리고 사정하다 싶이 해서 겨우 여자를 내보냈는데… 결국 그게 소문이 난거야. 뻔하지. 함정이었어. 여자는 내 침실에 들어오기만 하면 임무완성이었으니까… 흐흣, 배후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가 국장으로 올라가는 걸 싫어하는 놈이겠지… 그저께 조사조가 내려오고 결국 사직하는 수밖에 없었어.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가 없잖아… ”

“크아~”
나는 손아귀에서 잠자고 있던 술잔을 단모금에 굽을 냈다.
“그분…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정말루 모름까?”
넌지시 내 표정을 읽고 있던 여자가 다시 물음을 꺼내들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소문에는 외국으로 갔다고… ”
“외국에요?”
“네, 소문에요… ”
“그럼 한국? 아니면 일본?”
확인이라도 하듯 힘주어 되물었으나 내가 의연히 고개를 젓자 갑자기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럼 요즘… ㅇ시 관광국장은요?… ”
“거, 박 뭐더라… 이전에 거기 판공실 주임으로 있었다던… ”
“박주임? 박호걸이를 그러재임까?”
“?!”
바투 들이대는 여자의 반문에 나는 그만 데꾼해지고 말았다.
(이 여자… ㅇ시관광국에라도 있었나?)
대답을 대신한 그러한 내 놀라움에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나가는 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그 사람 국장이 된다더니 과연… 혹시 전화번호래도 알고 있다면… ”
“누구요?… ”
“그 외국에 갔다는 태국장님… ”
“태국장?”

나는 잠시 주저했다. 혹시 자기의 이름을 꺼내는 초면의 인물들하고는 될수록 자기 친구라는 신분을 꺼내지 말며 전화번호랑 주소같은건 더욱 대주지 말라던 친구의 부탁이 재차 내 뇌리를 찔러왔던 것이다.

“그거야 저도 알 수가 없지요.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
나는 굳게 모르쇠를 대며 나이프로 앞에 놓인 접시에서 고기 한점을 찍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냥… 주소두요?”
여자가 다시 물음을 걸어왔지만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그리고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여자는 금방 실쭉한 표정이 되어 접시에 놓인 음식들을 나이프로 직신거리기 시작했다.

“혹 주소같은거라도 알고 있으면… ”
“은혜를… 갚겠다는 얘긴가요?”
“네. <복수>를 해야죠.”
“<복수>? 아… ”
요즘 유행어로 남한테 받은 은혜를 되돌려 드리거나, 드린다고 할 때 완곡어법으로 포장해 멋스럽게 구사하는 말.
(복수라… )
그래도 웬지 내 뇌리에 들어온 그 단어는 시퍼런 칼날처럼 호의가 아닌 본의를 번뜩이고 있었다.

“허허… ”
그 바람에 별스레 부자연스러워진 내가 공허한 웃음을 날리자 여자도 구겨져있던 얼굴을 펴며 곧 포크를 잡았다. 그리고는 접시위에 놓인 쇠고기 바비큐를 살짝 내리찍어 나이프로 열심히 썰기 시작했다. 반질반질 기름 샤와를 하며 두툼한 육붙이를 살살 베들어가는 칼날이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근데 저, 옥경씨는 무슨 일로?… ”

소스에 찍은 바비큐를 오물거리고 있던 여자가 그런 내 물음에 익살스레 한눈을 찡긋해 보이더니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저 혼자 꼴깍했다. 그리고는 이상한 냄새를 맡은 것처럼 곱게 미간을 찌프렸다.

“호- 나온지가 오란데 어쩜… ”
그러면서 여자는 저렇게 마주앉아 조용히 라면문자를 흘리고 있는 외국인들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일견 하얀 진드기같이 피어싱을 한 귀불이 반짝 하고 빛났다. 연분홍색 립스틱이 연하게 발린 입술이 꽃잎처럼 벌어졌다…

여자는 지금 내가 투숙하고 있는 여인숙에 잠시 머물러 있는 중이라고 했다. 여인숙의 주인이면 이곳 한족친구의 오빠인데 러시아와의 최북단 접경지역인 여기에서도 첫손으로 러시아장사를 나갔다가 패거리싸움에 잘못 치여 발목의 힘줄을 잃었다고 했다. 요행 귀국해서 몇 번이나 인생을 접으려고 음독, 방화, 자해, 추락을 노력했지만 집안에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그게 뜻대로 되지 않았고 그러다 나중에는 심장이 터져라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리는 세월 우선 돈을 챙기고 나중에 콩밥 먹고 나온 녀석들을 복수의 사신으로 급파한다나. 반면 여자는 사흘 전 러시아 장삿길로 이 곳에 들어왔는데 내일이면 모든 수속이 끝나 출국한다고 했다.

“그럼 바깥분도 러시아에 계시나 보죠?”
“예… ”
생각밖으로 여자의 대답은 미지근했다.
“나간지는?… ”
“꽤나 됐씀다.”
“3년?… ”
“아니.”
“그럼 5년… ”
“아니.”
살래살래 머리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의 눈이 심술궂게 웃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럼?… ”
“러시아루 나그네사냥 간담다. 내일. 호호호… ”
멍청한 내 표정에 여자가 재미난다는듯 갸르르 웃음을 토했다.
(하다면 독신녀?… 이혼을 한?… )
고요히 내 뇌리에 은닉해있던 여자의 알몸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바람이 가득 찬 고무공처럼 금방 탄력이 전해올 것만 같은 젖가슴, 팔랑팔랑 원색의 범나비가 나래를 치고 있는 부얼부얼한 엉덩이, 그리고 오돌오돌 소름이 돋은 시허연 허벅지… 불끈! 사타구니 한곳에 힘이 들어갔다. 여자… 단내를 풍기며 입술을 감빨던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고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이건 도대체 언제면 세관 문을 넘어 들어오는거지? 좌우간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 바로 당장!…

여자와의 점심식사가 끝나자 나는 풍성한 인사와 함께 언제든 ㅇ시에 오게 되면 꼭 찾아달라고, 오늘 음식처럼 맛 나는 걸로 화끈하게 “복수”하겠다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그리고는 거리구경을 하겠다는 핑계로 그녀와 안녕을 교환했다. 택시를 불러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한동안 시적시적 거리를 거닐다가 저렇게 공용전화청이 보이자 바삐 찾아들어갔다…

   "태성일"
내 머리에 깊숙이 뿌리내린 친구의 전화 번호가 순식간 버튼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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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통보 2012-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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