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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렬사가족의 파란만장 이야기(1)
회령나그내    조회 2,842    2009.10.19회령나그내님의 다른 글      
3대렬사가족에 얽힌 우리 민족의 력사일화
원 전국로력모범 전국인대대표 고 문원성녀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문원성녀인은 1909년 한국 경상북도 안동군 임동면 로곡리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1912년 8월 20일 아버지의 등에 업혀 중국의 “북간도” 지금의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일대로 이주하였다. 그후 1920년 길림성 교하현 신참으로 이주를 하였고 18세 나던 해(1927년)에 길림성 교하현 신참 영안툰의 리성철(1909년생)씨와 결혼하였다. 결혼식날 두사람은 “두사람이 한몸이 된 이상 희망을 안고 고락을 같이 하며 조국의 금수강산 명승지를 밟으며 산보할 그날을 위해 우리의 사랑을 굳게굳게 다짐하였다.”(문원성씨의 회억록에서).

  리성철씨의 부친 리곡산씨는 한의사였고 역시 한국 경상북도 안동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왔으며 문원성씨의 아버지와는 잘 아는 사이였다.

  1927년 결혼후 리성철씨는 항일구국의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혼밀월의 달콤함도 잊고 결연히 연변 룡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에 입학하여 계속 공부를 하였다. 당시 룡정대성중학교는 쏘련, 상해, 북경 등지의 공산주의자들이 맑스-레닌주의사상을 전파하는 기지로 “공산주의사상의 온상”으로 불리웠다. 대성중학교에서 리성철씨는 맑스-레닌주의사상과 접촉하게 되였고 쏘련 10월혁명을 알게 되였으며 선진적인 혁명청년조직에 가입하고 항일구국의 굳은 신념을 갖게 되였다.

  1928년 10월 대성중학교 졸업후 항일구국단체의 파견으로 쏘련 연해주에 있는 “3€Y?”학원을 류학하고 교하현으로 돌아온 리성철씨는 최동산 등의 소개로 조선공산주의청년회에 가입하고 맑스-레닌주의와 쏘련 10월혁명을 선전하며 민중을 일으켜세우는 등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진행하였으며 1930년 6월 최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리상근, 구일서, 리한 등과 함께 길림성 교하현에서 첫번째로 되는 중국공산당지부(교하현신참당지부)를 건립하였으며 당지부서기로 당선되였다.

  리성철씨의 부친 리곡산씨도 적극적으로 항일투쟁을 후원하고 참가한 죄로 1930년 “불법”항일투쟁의 우두머리라는 죄명으로 1년반의 도형을 선고받고 길림감옥에 감금되였다.
  1930년 8월 상급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길돈철로연선(길림-돈화철로)의 돈화와 교하를 중심으로 하여 전례없는 “8.1길돈폭동”이 폭발하였다. 리성철(당시 리성철씨의 부친 리곡산씨는 길림감옥에 감금중)은 8월 1일 새벽, 교하에서 300여명의 조선인들을 이끌고 “8.1길돈폭동”에 참가하였다. 폭동은 군경소를 습격하여 십여자루의 총과 천여발의 탄알을 로획하였으며 수킬로메터에 달하는 철도(길림€뿵렸?를 파괴하고 전화선을 끊는 등 일제에 심중한 타격을 주었다.

  폭동은 그러나 반동군경들의 진압으로 실패하였으며 백여명의 참가자들이 체포감금되고 수명이 사형을 당하였다. 리성철씨는 탈취한 총을 갖고 십여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연변으로 이동해 계속 무장투쟁을 진행하였다.

  연변에서 리성철씨는 중국공산당 연화현(연길, 화룡)현위 군사부장을 담임하였으며 1931년 5월 연길 화전자에서 무장투쟁회의를 하던중 반역자의 밀고로 룡정일본령사관의 경찰들에게 체포되여 한국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였다. 감옥에서 리성철씨는 일제의 갖은 혹형과 유인을 물리치고 견정불이하게 투쟁하다 1934년 5월 1일, 26세의 젊은 나이로 일제에게 살해되였다.

  남편 리성철씨가 수년간 혁명을 위하여 각지를 전전하고 시아버지가 감옥에 갇혀있는 기간 문원성씨는 나약한 녀자의 몸으로 망을 보고 삐라를 살포하는 등 실제행동으로 남편의 항일투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시어머니와 어린 시누이 넷, 어린 아들 준섭이까지 일곱식구의 먹을것, 땔것(화목)을 혼자서 감당해야 했다. 문원성씨는 온 가정의 생활을 위하여 젖먹이가 딸린 젊은 녀자의 몸으로 남의 집 파종, 김매기, 가을걷이, 방아 등 삯일을 닥치는대로 하여 근근득식하였지만 항일에 투신한 남편을 원망 한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남편을 위하여 젊은 녀인이 고생을 할 필요가 있느냐며 많은 류언비어가 돌았지만 문원성씨는 고개 한번 숙이지 않았다.

  1931년 여름 낯익은 글씨체의 편지가 한국 서울 서대문감옥에서 문원성씨에게 날아왔다. 남편이 일제에게 체포되여 옥중에 있다는것이였다. 그러면서 부모의 근처에서 효도를 하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부인이 아버지에게 효도를 해달라는 내용이였다. 그때 당시 시아버지도 길림감옥에서 옥살이를 하고있는중이라 집안의 기둥 둘이 모두 일제에게 자유를 빼앗긴 상황이였다. 23세의 젊은 녀자로 문원성씨에게 있어서 이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질 일이였다. 하지만 문원성씨는 남편에게 “한 남자가 사회에 몸을 놓을 때 성공할 그날을 생각하면 가정은 생각마세요. 정의의 일을 하다 죽어도 떳떳한 일이며 남자의 의무이니 성공하는 그날까지 활동하세요. 당신이 사업에 성공하기전 죽더라도 당신의 뒤를 이어 불쌍한 인민을 위하여 싸울것이니 념려마세요.” (문원성씨의 회억록에서)라고 언약한 말을 생각하고 굳세게 살아나갔다.

  남편이 그리울 때면 고요한 밤, 아들 준섭이를 데리고 서울이 있는 남쪽하늘을 가리키며 “준섭아, 저기 저 별아래 아버지가 있단다. 일본놈들이 아버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집에 오지 못하고있단다.”하며 그리움을 달래였다.(문원성씨의 회억록에서). 수백번이고 남편이 갇혀있는 서울에 가서 마지막 한번이라도 남편의 얼굴을 보고싶었지만 돈이 없어 그 소원을 풀지 못했다. 이는 문원성씨의 마음속에 죽는 날까지 지울수 없는 천추의 한을 남겨주었다. 서울에 가보지 못하는 대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을 주문해 행여라도 남편과 관련된 소식이 나올가 눈이 빠지게 주시하였다. 1934년 여름 남편이 죽었다는 부고가 왔다. 빨리 시체를 찾아가라는 통보였다. 하지만 서울에 가서 시체를 찾아올 려비 백원이 없었다. 몇달동안 돈을 모으고 이집저집에서 돈을 꾸어 겨우 한사람의 려비를 마련해 리곡산씨가 서울에 가 아들의 시체를 화장하고 골회를 가져다 류하현 동산에 묻을수 있었다. 리곡산씨가 아들의 시체를 찾으러 가 서울의 려인숙에 묵고있는데 한밤중 이상한 꿈을 꾸었다. 리곡산씨가 아들 리성철씨를 보고 “왜 집에 가지 않느냐?”고 물은즉 리성철씨는 “발이 아파 가지 못하고있다.”고 하였다. 그후 리곡산씨가 아들의 시체를 찾아 발을 보니 발가락사이에 커다란 쇠못이 박혀있었다고 한다.

  1936년 리곡산씨는 길림 교하현을 떠나 흑룡강성 오상시 산하로 이주해 수전을 개간하여 가족의 생활을 유지하였다. 리곡산씨는 한의사로 한문에 능숙하고 사교능력도 좋았다고 한다. 오상에서 리곡산씨는 수백쌍에 달하는 논을 도급하여 농사를 지으며 항일투사들과 래왕하고 경제적으로 항일사업을 후원하였다. 그해 가을 항일을 후원하였다는 죄로 리곡산씨는 일제에게 체포되여 감금되였다. 아들을 죽인 일본놈들에게는 굴할수 없다며 리곡산씨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옥중에서 자결하였다.

  나라잃은 설음, 고향떠난 슬픔속에 남편 잃은 비통이 가시기도전에 생떼같은 시아버지를 잃은 문원성씨는 살아갈 용기가 없었지만 “내 비록 앞치마를 두른 녀인이지만 허리를 굽히고 살 내가 아니고 더 굳게 항일을 위해 살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남의 삯일과 연자질을 하며 봄이면 품팔이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준섭이를 잘 키워 아버지 뒤를 따르게 하리라”는 일념으로 오직 아들 준섭이를 위하여 사랑도 행복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거치른 인생길에서 외로운 삶을 살며 슬픔과 괴로움을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다.

  시아버지 리곡산씨가 옥사한후 시어머니와 나어린 시누이 넷, 어린 아들 준섭이를 먹여살려야 할 짐이 완전히 문원성씨의 두어깨에 떨어졌다. 시아버지의 죽음으로 문원성씨는 받아야 할 빚은 받지 못하고(시아버지가 죽었기에 빚진 사람들이 빚을 인정하지 않음) 시아버지가 진 빚만 갚다보니 빚더미에 주저앉게 되였다. 문원성씨는 당시 28세의 녀인으로 십여쌍의 논농사를 2년간 지어 빚을 전부 청산하였다.

  그후 문원성씨는 아들을 훌륭히 키워야 한다는 일념으로 혼자서 수십쌍의 논농사를 지어 홍역으로 귀에서 계속 고름이 나오는 아들을 할빈병원에 입원시켜 완치시켰고 그 아들을 소학교를 졸업시키고 할빈중학교를 졸업시켰다. 당시의 험한 세상에서 녀인혼자의 힘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문원성씨는 중국혁명에 적극 참가하였다. 1946년 민주동맹에 참가하고 흑룡강 주하민주동맹간부훈련소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1947년 3월 1일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후는 사회주의건설에 혼신을 다하였으며 혹룡강성 탕원현위 위원, 민족향 부향장으로 사업하였다.

  아들 리준섭씨는 중학교 졸업후 어머니의 영향하에 1946년 3월 18세의 어린 나이에 동북제4야전군에 입대하여 혁명에 참가하였고 1948년 8월 1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1951년 항미원조전쟁에서 장렬히 희생되였다. 세상이 무정하다고 할가, 하늘이 야속하다고 할가 세상은 리씨가문의 마지막 씨앗마저 빼앗아갔다.

  문원성녀인에게 있어서 아들 준섭이는 삶의 희망이였고 생의 동력이였으며 생활의 전부였다. 인간의 표현이 제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문원성녀인의 고통과 비애, 마음속에 맺힌 한을 표현할수는 없을것이다.

  3대를 고스란히 항일혁명과 중국혁명에 바친 문원성녀인은 영웅어머니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는 선후로 흑룡강성로력모범, 성인민대표로 활약했으며 1952년에는 전국로력모범으로 평선되여 중앙정부의 초청으로 1952년 국경관례단에 참가해 중남해 회인당(櫓켓베뫱훗慊)에서 중앙정부주석 모택동, 정무원총리 주은래의 접견을 받았으며 화북군구강당에서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덕의 접견을 받았다. 1954년에는 제1차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다.

  1958년 병으로 문원성녀인은 사전퇴직을 하였다. 그리고는 먼 친척벌되는 집의 아이(리창섭, 당시 9세)를 양자로 삼아 여생을 기탁하였다. 퇴직후 문원성씨는 17원(70년대 20원으로 상향조정)의 퇴직금으로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조직에 부담 한번 주지 않고 손 한번 내밀지 않았다. 건국후 아들과 남편의 렬사무휼금으로 300원이 나왔지만 모두 유아원에 기증하였다.

  문원성씨의 양자 리창섭씨는 어머니와 수십년을 함께 살아왔지만 웃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눈물 한번 흘리는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세월의 풍파가 어머니의 행복과 웃음을 빼앗아가고 눈물을 마르게 하였으며 근엄한 얼굴만 남겨놓았다”.

  문원성씨는 양자를 따라 1968년 료녕성 법고현 삼면선으로 이주, 1971년에 다시 료녕성 청원현 초시로 이주를 하여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2003년 3월 7일 한국 KBS라지오방송에서는 항일투사 리성철씨의 사적을 방송하였다. 병석에 누워 조용히 남편의 이야기를 듣고있던 문원성씨의 눈에서는 주르르 눈물이 쏟아져나왔으며 닷새후 9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문원성씨의 생전의 소원대로 그의 골회는 1980년 건립된 길림 교하현동산혁명렬사릉원에 안치되여있는 남편 리성철씨의 산소에 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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