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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불도 어영구영하더만. (초록불이 전부가 아니란거)(6)
대조영    조회 3,680    2008.12.31대조영님의 다른 글      
한국사학계 최대의 논쟁거리 <<규원사화>>

역사학에 대한 인연은 이렇게 한순간에 시작되는가 봅니다.

아래 인용글에 대한 저작권은 북애자님께 있음을 밝힙니다.

[출] 바로잡아야할 역사들 ( http://cafe.daum.net/realhistory/ ) 바로사 게시판 # 6587 2001-05-26

-- 이하 전문인용 시작 --

한국사학계 최대의 논쟁거리 <<규원사화>>

북애자

규원사화는 강단사학계의 주장처럼 구한말 민족주의자가 위작한 위서인가.
아니면 재야측에서 주장하듯 숙종조 원년 북애노인이 저작한 진서인가.

규원사화의 존재는 우리 사학도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학이란 학문 흥밋거리를 제공하는 매력덩이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존경하는 우리 사학전공 교수님들과 사학도들을 욕먹게 만드는 골칫덩이기도 하다.

나는 사학과에 들어간 이후부터 규원사화 문제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었고, 그래서 전공까지 이 분야를 선택했다.

수많은 관련서적을 탐독하고, 노력한 끝에 결국 규원사화 문제에 일정의 결론을 얻는 데 결국은 성공했다.

규원사화는 결국 어쩔 수 없는 위서였다.

조인성을 비롯한 국내 유수의 사학 전공자들이 오래 전부터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명쾌한 위서론을 제시했던 반면 재야사학계에서 주장하는 진서론들은 그야말로 근거가 희박한 억측과 추리, 추정을 바탕으로 한 소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규원사화 위서론으로 완전 기울고, 그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 가던 즈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하던 학교 선배님으로부터 규원사화 한영본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그것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서고]1)에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기존에 노출되어 있는 수종의 필사본 규원사화들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규원사화 한영본이 무엇이 다른지 몇 마디 물어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 그런데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나 연구원들도 모두 돌아이들이로군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규원사화는 현재 국내사학자 대다수가 위서라고 단정하고 있는 쓰레기 같은 책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서고가 쓰레기 집합소입니까? 아무리 사학 비전공자들이라지만 정말 너무 한심하고 답답하군요. 당장 그거 귀중본서고에서 치워버리라고 권하고 싶어요"

내가 이렇듯 선배에게 멋모르고 이죽거렸던 것이 내 사학도 생애 최초의 망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잠깐만...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그런데 말이야. 우리 도서관측의 관계자들도 규원사화란 책이 사학계에서 이단시되고, 위서 취급받는다는 것쯤이야 충분히 알고 있어. 그런데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도서관측에서도 도서의 분리나 서고지정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야. 귀중본서고에 보관되어 있는 자료들은 일차적으로 간단한 서지검토를 거쳐서 희소성이나 가치성을 검증 받은 다음에
소장이 결정되는 거야. 뭐 아무렇게나 직원 한명이 멋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란 말야.

현재 도서관 귀중본서고에 소장되어 있는 규원사화 한영본이라는 것도 해방 직후 양주동, 손진태의 필사본 규원사화 계열과는 다른 것으로서 김수일이라는 고서점 주인에게 100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그것을 72년도에 전Y대 교수로 김원룡과 함께 고고학계의 양대 산맥으로까지 불리우는 S교수와 서지학회장까지 지낸 L박사와 한문학자인 L 교수 등 세명의 전문가들이 고서심의위원회를 열어서 규원사화 한영본이 숙종원년 제작된 진본임이 인정되고, 가치성 또한 확인되어 귀중본서고로 옮겨진 거야.2)

네가 말하는 그 역사학이라는 위대한 학문에서 말하는 규원사화 위서론이라는 것이 뭐니? 내가 알기론 고작해야 그 내용에 구한말에서야 쓰여지기 시작한 용어들이 나온다는 것이나, 그 작자의 불명확성, 그리고 규원사화에 인용된 사서들이 그 이전의 문헌에서는 인용된 적이 없다는 이유, 결국 과연 그 당시까지 그런 사서들이 전해지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 또한 북애노인의 비분강개한 태도가 숙종조가 아닌 구한말의 나라를 잃을 그 상황에서나 어울린다는 비합리적인 추정. 이런 정도 아냐? 그런 것이... 물론 나는 네 말대로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이미 과학적으로나 서지학적으로 조선조 숙종 원년 제작의 원본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용이 의문=구한말에 위작된 위서"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니 네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로서는 배꼽잡고 비웃을 일이야

우리 도서관 소장의 숙종조 원본과 사학자들이 말하는 구한말 조작설, 두 개의 앞뒤가 맞지 않는 괴리가 일치하려면, 후후.. 그래. 구한말에 민족주의자에게 조작된 규원사화의 필사본 중 하나가 무슨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숙종 원년으로 날아가서, 300여 년을 썩히다 김수일에게 전해졌다.. 이러면 설명이 가능하군"

나는 그 선배의 반론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선배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비전공자로서 사학자들의 규원사화 위서론에 반론을 해볼까."

"... 한번 들어보죠."

"지금 삼국사기가 있어. 이건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진서야.

그런데 여기에 "文化"라는 용어가 나온다고 가정을 해보자. 물론 거기에 기록된 문화라는 용어는 오늘날과는 의미가 다른 뜻에서, 예를 들어 '경작'이나 '재배'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가정해보는 거야.3) 그리고 세월이 흘러 고대, 중세에는 (경작, 재배의 의미로) 활발히 쓰이던 문화라는 용어가 후대에 와서는 전혀 쓰이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거지. 언어라는 것은 언제나 세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마련이야. 그건 사학을 하는 네가 더 잘 알테지.

그리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근세에 이르러 서양에서 교양, 예술을 일컫는 culture를 일본에서 文化라고 새로이 번역했지. 그런데 사람들은 예전에 우리가 재배, 경작의 의미로 쓰였던 문화라는 단어는 망각하고 있었어. 자 그럼.. 위서 하나가 탄생한 거야. 삼국사기는 위서인 거야."

"......................,"

"네 생각은 어떨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상식선에서 볼 적에, 작자의 불명확성이나 후대에나 사용된 용어가 나온다는 사실 등은 규원사화 진위논쟁에서 애초에 거론될 필요가 없는 쓰레기 같은 주장들이라고 본다.4)

수많은 동양고전 중에서 작자가 밝혀지지 않은 것은 부지기수야. 그렇다고 누가 그런 고전들이 위서라, 혹은 조금 전의 네 말처럼 쓰레기 같은 책이라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매도하고 비판하는 학자가 한명이라도 있는지 도리어 묻고 싶다.

또한 일본의 최고의 정사인 일본서기에는 아예 발문이나 서문 자체가 없어 편수책임자가 누군 지도 모른다지? 거기에다 진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8세기에 편찬되었다는 이 사서에 17세기의 용어들까지 나온다고 하더군, 너도 일본사에 한때 심취했었다고 들었다.


내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거야. 그렇다고 일본서기를 17세기에 비로서 위작된 위서라고 주장하는 일본 사학자가 있어? 한번 찾아볼래?

한가지 예를 더 들어 볼까? 중국 춘추시대의 명정치가로 널리 알려진 관중이 저술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책이 있지. 너도 알다시피 바로 [관자]란 책이야. 그런데 그걸 설명하는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열이면 열이 모두 [관자]는 관중이 지은 책이 아니라 관중의 이름을 가탁한 전국시대 사람들이 지은 책이라고 하더군. 그럼 관자는 위서냐? 아니면 진서냐? 당연 위서지.

그런데... 웃기는 것은 사학자들이란 양반들이, 소중한 우리 역사서인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관자나 일본서기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의문점들을 바탕으로 위서라 몰아붙이고, 그렇게 찬밥신세, 쓰레기 취급하면서도 정작 관자나 일본서기에 대해서만은 어찌 그리 온건한지. 전국시대 위서인 관자의 내용을 바탕으로 춘추시대 당시의 고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우리 학자들이야."

"!?.................,"

"내가 한마디만 더해 볼까. 너도 이제 뭔가 수긍하는 것 같은데..... 일단 너도 규원사화 위서론자이니 만큼 익히 잘 아는 내용이겠지만, 규원사화의「만설」중 일부를 인용해 볼께

{-나라의 흥망은 뒤바뀜이 무상하니 지금 조선의 불행은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실마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인심이 분열되고 민기가 가라앉은 것을 보니 붓을 던지고 길게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환인이여. 슬프다 환인이여. 지금 한 조각의 진역과 한 줄기의 유민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L모 학자는 만설의 위와 같은 내용에 대하여 "숙종2년에 특히 불행했던 일도 없고 나라가 망했던 것은 더욱 아니었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C모 학자는 규원사화에 기록된 계달이나 문화 같은 용어상의 문제를 언급하며, 규원사화가 구한말에 위작된 위서라고 단정지은 뒤에, 위의 만설 부분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어.

{.....라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였다. 『규원사화』가 1675년에 쓰여진 것이라면 이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암담한 실정을 걱정한 것이라고 불 수 있다. 하지만 『규원사화』에 나오는 이같은 저자의 심경은 근대인의 것임이 분명하다. 따라서‘한 조각의 진역’과 ‘한 줄기의 유민’은 일제의 식민지가 된 이후의 우리 민족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5)

일단 내가 용어문제에 대한 비판만큼은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은 아까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야. 그렇지만, 그래 이 학자들의 이러한 비판에도 분명히 일리가 있어.

'당시 숙종조, 병자호란이 지난지 언제인데' 이렇게 생각하면서, 저건 아무래도 구한말 나라가 누란에 위기에 처한 그 시점에나 들어맞는 한탄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결코 아닐 거야. 그런데 규원사화 - 만설의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주장되는 규원사화 위서론은 당시 숙종조 조선의 지식층들의 비참한 현실인식을 완전 도외시한 역사왜곡이나 진배가 없어.

다음 내가 좋은 글을 한번 인용해 보겠어.

{"요즘 태평한 세월이 오래다 보니 기강이 해이해지고 무너져 안팎의 군병들은 대부분 헛문서만 끼고 크고 작은 병기들은 모두 형식적으로 갖춰 놓았다. 진법에 임하고 무기를 쓰는 조련술을 익히지도 않았고 보루를 지키고 적을 대하는 방어책은 아주 어두우니 만약 수만의 강한 오랑캐가 있어 짓밟고 온다면 모두 장차 바라보기만 하다가 그대로 흩어져 달아날 것인가. 을지문덕이 수나라를 격파하고 양만춘이 당나라에 항거하던 것과 비교해보면 어떠할 것인가. 이것은 병사를 평소 기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장수로 적절한 사람을 얻지 못한 때문이다. 이같이하여 어찌 능히 강한 적을 막고 오랑캐를 막으리오. 개탄할 노릇이다."

"아아! 안시성주의 공적이 우리나라에서 으뜸이니 우리나라 사람은 마땅히 그 이름을 전해가면서 외어야 할텐데도 중국사람은 능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연 알지못하니 어찌 당시 사관이 빼 먹고 기록하지 않았음이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여러번 병화를 겪어 서적이 흩어져 없어져서 그러했겠는가. 진실로 부끄러운 노릇이다"}6)

문제 하나 낼까? 위와 같은 글이 작성된 것은 언제일까? 구한말? 왜란이나 호란 직후? 천만에, 이것 역시 규원사화가 지어진 시대와 동일한 숙종조 홍만종의 문집에 나오는 내용이야.

홍만종은 분명한 실존인물이고, 그의 저서나 문집들은 사학계는 물론 국문학계에서도 모두 확실한 진서로 인정하고 소중한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지. 그럼 홍만종의 글과 규원사화의 만설을 규원사화 위서론자들의 관점에서 비유해 보자면....

만약 규원사화 위서론자들이 만설의 위와 같은 내용을 바탕으로 위서라 단정짓는 행위가 올바른 것이라 하면, 규원사화는 물론 위에서 인용한 홍만종의 글까지 위서라는 소리나 진배없다는 거지. 홍만종 글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분강개한 한탄의 목소리는 규원사화의 만설을 초월하고 있거든, 북애자의 비분강개함이 숙종조 상황과 맞지 않는다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억측에 가까운 선입관을 바탕으로 규원사화 = 위서라 주장한다면, 홍만종의 비분강개함 역시 당시와는 걸맞지 거짓된 내용, 그의 문집, 그의 존재자체도 僞作, 爲人이라는 소리 아니겠어.

그렇지만 그러한 위서론자들의 방법이 틀렸다면, 규원사화는 홍만종의 글로 인해서 당시 지식층의 시대인식까지 제대로 반영하고 있다 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진서론의 근거로 귀결될 수 있는 거야."

나는 선배의 이런 주장들에 수긍을 하면서도 이대로 물러날 수 없다는 오기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규원사화에 인용되어 있는 사서들, 예를 들어 진역유기 같은 문헌은 다른 자료에서는 내용을 전혀 확인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실전된 사서가 아닙니까? 그런 서적들이 다른 여타의 문헌자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다가 조선조 숙종대에 갑자기 뻥하고, 출연했다는 것 자체가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래? 넌 그렇게 생각하니.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까?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만 인용되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완전히 사라진 역사서가 하나 있지. 바로 삼한고기라는 것인데, 삼국유사 이후의 문헌에는 전혀 인용되지 않다가 조선조 정조대의 열려실기술에..... 네 표현을 빌리자면, 그래.. 뻥하고 갑자기 출연해서는 자랑스러이 인용되고 있거든. 네 말에 따르면 결국 열려실기술이나 그에 인용된 삼한고기도 위서라는 소리니?7) 나는 진역유기가 다른 사서들에는 인용되지 않았던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풀이할 수가 있어. 바로 취사선택이라는 거지.

규원사화의 내용으로 유추해 보건대 진역유기란 책은 분명히 반유교적이고 반사대적인 진취적이고 대륙적인 기상을 지닌 우리의 우리 선조들의 손으로 직접 저작한 사서였지. 그런 사서를 유교와 사대주의가 사상적, 정치적 근본이었던 조선의 유학자들은 인용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겠지.

북애자가 자신의 본명을 남기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런 사실 때문이 아니겠어. 이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한 것인데, 역사학이란 학문은 우리 비전문가들이 보기엔 너무나 허황하고 억측이 난무하는 비과학적인 사이비 학문 같다. 나의 결론은 이래. 선배로서 그따위 사이비 학문은 때려치우라고 권하고 싶다. 차라리 재야가 되는 것이 어떠니? 그편이 훨씬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을 거야 물론 재야 측이 역사학의 기본적인 상식이나 지식이 없고, 거기다가 국수주의의 조류에 편승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글쎄......"

".... 흐..... 음 ㅡ_ㅡ;"

(아래는 참고자료를 열거한 것 같습니다.--야만이 주석)

1)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서고 소장 규원사화 한영본.
표제/저작사항 揆園史話 / 北崖老人(肅宗朝) 著
판사항 筆寫本
발행사항 負兒岳(北漢山) : 揆園草堂, 肅宗2(1675)
형태사항 68張 : 四周單邊 半郭 21.4 x 16.6 cm.,
有界, 10行20字註雙行 ; 28.8 x 21.8 cm
주기사항
序: 上之二年乙卯(1675)...三月上澣北厓老人序于揆園草堂
분류기호 한국십진분류표(박봉석편) -> 2105
청구기호 古貴2105-1

2) 김성구 역주 규원사화 교감기 중 일부 인용
북애노인의 친필본으로 알려진《규원사화》는 국립중앙도서관 측이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사이에 서울 시내의 한 서점에서 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현금 100원에 구입한 것이다. 그 후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등이 참가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乙卯, 서기 1675년)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되었다.(고평석, <한배달> 6호, 1989년.)

국립중앙도서관소장본(貴629, 古2105-1)은 1990년에 한뿌리 출판사에 의해 그 원전이 처음으로 영인 출판되었고, 그 책자를 기준하여 책 제목을 제1쪽, 그리고 序의 시작 부분을 제3쪽으로 산정하였을 때, 총 143쪽 26,828자(제 45쪽 闕二字 포함, 제목 제외)이다. 이 판본을 편의상 [한영본]이라 부른다.

*참고 : 규원사화에 대한 고서심의위원회 실제 여부는 명확치 않다.
일단 고서심의위원회에 대한 관련 자료가 거의 전무하다. 다만 한배달지에 게재되었던 고평석님의 글이 그나마 고서심의위원회에 대한 근거 자료가 되고 있으나, 위서론자들이 그에 대한 수긍도 반론도 없어 의아할 뿐이다.

또한 고서심의위원 당사자들의 입장표명도 달리 없는 듯 하여, 규원사화 진서론자라고 자부하는 본인 역시 고서심의위에 대한 실제 여부가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나, 이 글은 픽션의 형식을 빌어 위서론을 비판하는 것이며, 고서심의위원회 자체에 모든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본다.

3) 서양에서 culture의 원래 의미는 `경작`과 `재배`였으나 후대에 오면서 `교양`, `예술`을 뜻하는 의미로 바뀌었다고 한다.

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규원사화 한영본이 진실로 조선 숙종조의 원본이라면, 거기에 나오는 문화나 계달, 천주와 같은 용어들은 규원사화 위서론의 근거로 사용될 이유가 전혀 없다. 도리어 구한말에 이러한 용어들이 일제에 의해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조선에도 이러한 용어들이 쓰여지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쓰여지는 것이 마땅하다.

아울러 이상시 저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에서는 이들 문화나 계달이라는 용어가 이미 조선에서 쓰여지고 있었음을 증명한 적이 있다.(조성익님이 상고사학회 게시판에 올린 「단군조선, 규원사화, 홍만종」이라는 글 참고), 또한 규원사화에는 천주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을 바탕으로 당시엔 천주교가 유입되기 이전이라는 이유를 들어 규원사화 위서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의외로 존재한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고니시를 따라온 천주교 신부는 조선민초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주장까지는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일본군인들 중 다수가 천주교를 신봉하고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또한 소현세자를 따라온 청나라 천주교인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까지나 역사에 기록된 천주교인들이고, 그 이외에 또 어떤 사람들이 천주교를 알고 조선에 돌아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라시대에는 네스토리우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경교라는 것이 당나라에서 유행했고, 신라시대의 돌십자가 같은 것도 출토가 되었다. 만약 규원사화 위서론자들의 잘못된 진위판별법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그 돌십자가도 위작이고, 경교의 존재 자체도 부정해야만 되는 것이다.

5)『규원사화(揆園史話)』와『환단고기(桓檀古記)』비판 「韓國史 市民講座 제2집」, 일조각, 1988 조인성(趙仁成)  논문을 보시려면 : http://www.eurasiad.com/handan_F.html

6) 국문학자 진갑곤 교수님 홈페이지에 있는 번역, 그분의 홈페이지는 지금 폐쇄되고 없음.

7) 상고사학회에 올려져 있는 조성익님의 「단군조선, 규원사화, 홍만종」이란 글을 참고.

[조성익님 글의 일부]  

연려실기술은 영정조 시대의 이긍익에 의한 저술로서, 강단 사학자 중에서 연려실기술이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분명히 연려실기술은 규원사화가 저술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 (숙종 시대) 이후의 저작입니다. 강단 사학자 중의 일부는 규원사화의 저본이 된 진역유기가 숙종 때까지 전해진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인용되지 않으므로 고려 시대에는 이미 실전되었을 것으로 단정해야만 하는 (일부 강단 사학자는 그들의 태도를 보아서 이렇게 단정할 것으로 추정함) <삼한고기>가 숙종 이후의 영정조 시대에 저술된 연려실기술에 등장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 이상 전문인용 끝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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