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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민족사업의 한길에서...
기사 입력 2006-10-07 17:29:00  

원 길림시민위 리암주임의 이야기  

평생을 민족사업을 위해 로심초사해온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원 길림시민위 리암주임이다.

대학생 인쇄공장 로동자에서  기층의 민족간부로

1961년 9월 학교의 추천을 받아 북경 중앙민족학원 한어학부에 입학한 리암은 거기서 차츰 민족정책을 학습하고 료해하게 되며 여러  민족 사람들을 접촉하게 된다. 그의 학급에는 이족, 회족, 시버족, 따이족, 몽골족, 조선족 등 소수민족 학생들이 있었는데 말그대로 단란한 민족대가정이였다. 대학공부를 하면서 리암은 여러 민족의 전통, 문화, 생활습성, 례의범절 등을 장악하게 되였고 다민족국가에서의 민족정책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한층 더 깊은 인식을 갖게 되였다.

하여 그는 시간만 나면 도서관을 찾아 여러 민족에 대한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필기도 남겼다. 독서 및 여러 민족과의 접촉을 통해 리암은 조선족은 문화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발전된 민족이라는 자부감을 갖게 되였다. 당시 반의 학급장과 한어과대표를 맡았던 그는 1년에 한달씩 농장에 내려가 농업로동에 참가하였으며 8개월동안 《사회주의 교육운동》으로 사천성 아바장족자치주에 사회주의교육공작대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졸업후 대부분 대학생들은 교원으로 분배받았지만 그는 기어코 공장의 로동자로 되여 재교육을 받겠다고 상급에 청원하였다. 그는 화전현 인쇄공장의 로동자로 배치받았는데 당시 이는 화전현의 특대뉴스거리였다. 그가 인쇄공장에서 손에 기름을 가득 묻히고 일할 때면 창가에 많은 구경군들이 몰려오기도 했다.

1970년 12월, 그는 화전현에 분배받은 대학생들중에서는 첫사람으로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후에 농촌간부로 파견된 그는 1년에 250일을 생산로동에 참가했다. 1980년 10월 리암은 화전현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당시 화전현내에는 1만여명의 소수민족이 살고있었는데 조선족과 회족이 대부분, 그들의 생활형편은 아주 어려웠다. 민족사업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 리암은 단지 농사에만 국한되지 말고 소, 돼지, 닭, 오리 등 사육업과 인삼재배업을 할것을 농민들에게 호소함으로써 백성들의 치부열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화전현 소밀골공사 북강회족소대는 전 현적으로 유일하게 회족들이 집결하여 사는 곳이였는데 촌민들의 경제수입은 말할나위가 없었다. 마을에는 기와집이라고는 한채도 없이 전부 올망졸망한 초가집들이였다. 이런 형편에서 그는 마봉전 촌장을 동원하여 먼저 촌에서 선줄군가정 5호를 선택하여 신용사에서 대부금을 해결해주고 민위에서 선대금을 주는 방법으로 종자소를 사 남먼저 소사육을 시작하게 하였다. 매호에 우량종자소 두마리씩 해결해주어 시작된 소사육으로 3년후에는 마을의 인당 소마리수가 2마리로 늘어났다. 단맛을 본 촌민들이 열심히 소사육을 한 결과 원래의 초가집들이 기와집으로 모습을 바꾸었으며 마을길도 새롭게 변모되였다. 제일 눈에 띄이는 변화는 몰라보게 제고된 촌민들의 생활수준이였다.

한데서 현의 년말총화평의활동에서 북강회족소대는《화전현민족단결진보선진집체》에 당선되였으며 시와 성의 표창도 받았다. 이밖에도 회족들의 생활습관과 종교신앙을 존중해  회족청진사와 회족식당을 해결해주어 회족들이 자기의 습관대로 생활과 종교활동을 조직하는데 편리를 도모했다.

그는 또 1981년  6월 6일을 《화전현 조선족로인절》로 정하고 전 현 600여명 로인들을 현성에 모셔와 영화감상을 시키고 무료로 점심식사를 대접하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화전현 력사이래 제일 큰 행사로 주목되였다.

《전국민족단결모범》 금메달을 받고

1985년 2월 리암은 길림시민위 주임으로 사업전근을 했다. 민위주임으로 사업하는 기간 그는 취소된 길림시조선족유치원을 회복, 창읍구조선족소학교 새 교사를 새로 건설했으며 8년동안 건설중에 있던 영길현조선족중학교를 준공시켰다. 룡담산조선족산보놀이, 조선족운동회 등은 모두 리암주임이 심혈을 기울여 발기하고 조직한 조선족집단행사들이였다. 그는 또 양계업으로 알라디촌을 치부의 길로 이끌었다.

1997년 7월, 리암은 유럽 고찰기간 코가 답답하고 벌겋게 부어나 북경에 도착하여 301해방군총병원에서 체계적인 진찰을 받았는데 결과 림파종양이였다. 당시 화학약품항암치료로 오는 불량반응으로 그의 몸은 형편없이 허약하였다. 그가 입원해있는 기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지방 민족사무위원회, 길림시정부의 지도자들이 찾아와 병문안을 하고 고무격려해주었다. 장장 10개월동안의 입원생활은 그를 무던히도 괴롭혔건만 그는 세상에 못이겨낼 일이 없다는 신념 하나로 병마를 이겨내고 새 생명을 찾았다. 병원측에서는 그의 정상적인 회복은 기적이 아닐수 없다고 했다.

민족사업을 위하여 일생을 분투한 리암주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선후로 길림성제2차민족단결진보표창대회에서 길림성 인사청과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로부터 대공(大功)증서를 받아 로임이 한급 올랐고 그해 9월 국무원으로부터 《전국민족단결진보모범》칭호와 금메달을 수여받았다.

오늘도 민족을 위하는 일에 발벗고나서

건강이 회복된 그는 2005년 길림시조선족로인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였다. 회장을 담당하고보니 2000여명 회원을 가진 협회가 활동장소는커녕 회의를 소집할 자리마저 없었다. 그는  로인활동장소를 마련하는 동원대회를 열고 맨먼저 2000원을 내놓았다. 협회 부회장들도 따라서 너도나도 1000원을 헌금, 회원들은 10원, 50원, 100원, 500원...모두가 헌금에 나섰다.룡담구 원씨로인 부부는 모두 뇌혈전환자이지만 각각 500원씩  1000원을 기부했으며 퇴직한 한 할머니는 평소 아껴모은 돈 1000원을, 선영구의 양로금도 없는 한 할머니는 딸에게서 매달 받아쓰는 300원 생활비에서 아껴모은 돈 500원을 협회에 기부하는 등 감격적인 장면들이 나타나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길림시조선족기업가협회 조약걸회장은 인민페 만원을 기부하고 활동실 내부시설 마련에 1만 5000원을 기부하였다.

사회각계, 기업가, 정부의 지원으로 20만원이 모금되여 마침내 500평방메터의 활동실이 마련되였다. 활동실은 문예활동실, 오락활동실, 로인대학(노래, 춤, 서예, 그림그리기)으로 시설이 구전해 로인들의 만년의 생활을 풍부히 할수 있는 장소로 되였다.

평생을 민족사업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온 리암회장은 지금은 로인들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 사업으로 여생을 빛내고있다.

고설봉기자

길림신문 200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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