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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와 조선족
기사 입력 2015-04-25 15:10:02  

1990년대 중엽부터 시작하여 조선족의 정체성, 문화성격 등 문제를 둘러싸고 중한일 삼국 학계에서 장기적의 탐색과 연구를 진행하여 왔다. 조선족 문화론에 대한 토론을 볼 때 정판룡 교수의 “며느리론”, 허명철 교수의 “사과배”비유, 황유복 교수의 조선족문화 독립성에 대한 논술, 김강일 교수의 조선족 “변연문화계통론”, 유경재 교수의 “다중문화론”등 감성적인 차원에서 이론적 차원에 이르는 다양한 시각에서 조선족 문화의 함의와 성격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조선족 문화 성격에 대한 논의는 인구이동이 가속화되고 있는 가운데 조선족 문화를 재구축하려는 노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선족문화에 대하여 의논할 때 먼저 이 문화가 일조일석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하여 생활하면서 동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와 접촉하는 가운데 형성된 생활지혜의 집합체라는 점을 이해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운동회는 만주국시기 일본인들이 식민지통치의 중요한 수단으로서 사용하였으며 조선족들은 강제적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운동회는 지연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계승되었고 조선족마을들의 중요한 연중행사가 되었다. 현재 북경, 청도, 상해 이우 심지어 일본 조선족 사회에서도 조선족 운동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운동경기가 아니라 도심에 산재되어 있는 조선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교류할 수 있는 중요한 만남의 장이 되고 있다. 청도 조선족 운동회의 경우, 해림, 녕안, 오상, 연길 등 지역별로 팀을 선발하여 경기를 진행하고 있는바 운동회를 통하여 지연네트워크가 재조합, 강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일본에서 유입된 운동회라는 형태의 모임이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활용되었고 조선족 특유의 형식으로 글로벌시대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조선족 문화를 이해하기 위하여1980년대까지 조선족사회의 정신, 문화, 경제, 교육의 기반으로 존재하였던 조선족 마을 문화, 특히 벼농사와 농경문화가 어떠한 문화였으며 조선족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살펴보려 한다.

조선족 마을의 형성

우리 조상들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모여서 살면서 조선족 마을들이 형성되었다. 이주초기 마을들은 지금처럼 집중되어 있은 것은 아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그 근처에 집을 지어 살다 보니 3,4호 혹은 5,6호가 모여 사는 자그마한 자연마을들이 일반적이었다. 이보중 교수의 통계에 의하면1922년 심양 근처에 조선족 마을이 60개 있었는데 1~5호가 7개, 6~10호가 10개, 11~15호가 8개, 16~20호가 12개, 21~30호가 11개, 31~40호가 5개, 51~60호가 3개, 71~80호가 3개, 105호가 1개였다. 이는 조선족 마을들이 이주민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산재한 자연마을이 위주였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주초기의 마을주민들은 지연 혹은 혈연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하고 있었고 한반도 출신지역의 풍습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930년대 이후, 일본 식민통치자들이 안전마을을 건설하면서 자연마을들이 강제적으로 철거되고 집중적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전쟁피난민들의 안식처 마련으로 시작된 안전마을건설이 항일무장과의 연결 차단, 식민지통치 등에 유리하게 되자 대규모적인 집단부락건설이 1940년대초까지 추진되었다. 집단부락 건설은 각지에 분산되어 있는 조선족들을 강제적을 한 곳에 집중시켜 거주하게 함으로써 조선족의 전통적인 거주지역, 거주형태, 이웃관계 등을 개변시켰다. 이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은 혈연(血緣)이 아닌 지연(地緣)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집단부락이 해체되었으며 조선족 마을들은 토비들의 집중습격대상이 되었다. 식민통치에서의 해방으로 인한 고향으로 돌아가는 붐과 토비들의 습격을 피하기 위한 이민으로 인하여 동북 조선족사회는 커다란 인구이동을 겪게 되었다. 특히 토비들의 습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도시나 비교적 큰 마을, 연변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연변지역의 경우, 1940년대말에 인구의 절반이 바뀌었다고 한다. 즉 연변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의 반수 정도가 한반도로 돌아가고 연변 이외 지역에서의 인구유입이 빈 자리를 보충하였다는 이야기이다. 산재지역의 경우, 규모가 크지 않은 일부 조선족 마을들은 1940년대에 아예 사라지게 되었고 규모가 좀 큰 마을들은 원 주민들과 각지에서 피난하여 온 피난민들이 자위단을 형성하여 마을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으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은 또 한번 사회공동체의 해체와 재 구축을 겪게 되었다. 필자의 고증과 현지 조사에 의하면 1940년대 말 여러 조선족 마을들은 사실 조선반도 여러 지역 출신 조선족 농민들의 집합체였다. 한 마을 안에서도 조선반도 같은 지역 출신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작은 집단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격동하는 1940년대 후반에 같은 조선사람으로서 조선족 마을들에 모여들어 살게 되었지만 지역습관 경제형태 등이 다름으로 하여 같은 출신지역 사람들끼리만 어울려 살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족의 한반도 출신을 보면 함경도, 평안도와 경산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간간히 북도치, 북선사람, 남도치, 남선사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북선(北鲜), 남선(南鲜)이란 일본식민통치자들이 조선족에 대한 멸칭으로 한반도 북부와 남부출신들을 구별하여 부른 것이다. 조선족들도 처음에는 북선, 남선이라고 부르다가 북도치(함경도, 혹 연변지역), 남도치(경상도, 혹 연변이외 지역)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족들에게 남 북부 출신으로 인한 차이는 별로 없다고 보아야 하지만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남 북부 출신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북부 출신의 경우, 한반도 북부에 산간지대가 많으므로 말미암아 화전민 출신이 대다수였으며 주로 한전농사를 많이 하였다. 가령 벼농사를 하더라도 주로 육도(陸稻)를 재배하였다. 남부출신(일부 평안도 평야지대 출신 포함)의 경우, 한반도에서도 주로 벼농사를 하였기에 한전보다는 수전에 익숙하였다. 중국에 이주하여서도 주로 벼농사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 형태뿐만 아니라 방언, 경제수익, 음식습관 등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즉 남부출신의 경우, 벼농사에 능하고 맵고 짠 음식을 좋아하며 경제수입이 상대적으로 높고 경상도 등 남부방언을 사용하였다. 북부출신의 경우, 한전농사에 능하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였으며 경제수입이 벼농사에 비하여 적었고 함경도 등 북부방언을 사용하였다. 특히 방언의 경우, 1940년대말까지만 하여도 함경도와 경상도 방언은 서로 잘 알아듣지 못하고 소통이 어려울 정도로 차이가 많았다. 이러한 선명한 지역적 차이로 말미암아 1950년대 초까지만 하여도 한 마을 안에서도 같은 지역출신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다.

1950년대초까지 조선족마을들은 인구유동이 빈번하였고 안정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해방초기의 조선족 마을은 출신지역, 경제형태, 거주형태, 생활습관, 언어가 모두 다른 조선족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지역출신의 차이와 경제수익의 차이를 해소하고 마을을 하나의 조선족 공동체를 형성함에 있어서 벼농사의 보급과 발전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벼농사와 조선족

1980년대에 이르러 조선족=벼농사라는 이미지는 이미 중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인식으로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조선족들이 이주초기부터 모두 벼농사에 능숙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족 마을 내부에서 조차 벼농사기술 보급이 진행되었고 1980년초 토지도급제를 실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서로 벼농사 기술을 배워가면서 농사를 지었다. 이는 위에서 말한 지역별 경제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족의 동북지역 수전개발은 여러 차례의 실험을 걸쳐 1875년에 이르러서야 벼재배에 성공하였고 중국 동북지역 벼농사의 주력이 되었다. 1920년대에 국제 쌀 가격 상승으로 동북지역에도 수전개발 붐이 일어났으며 수많은 도전공사(稻田公司)들이 조선족을 고용하여 벼농사를 하였다. 1930년대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강제적으로 집단부락정책을 강행하였고 여러 지역의 조선족 주민들을 강제적으로 집중시켜 군사화된 관리를 실시하였다. 1937년부터 일본은 중국 동북지역에 대규모적인 집단이민을 실시하여 주로 능숙한 벼농사 경험을 갖고 있는 조선반도 남부지역 농민들을 모집하여 중국 동북지역 각지에서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수전을 개발하였다. 만선탁식회사는 1933년부터 1940년에 이르는 7년사이에 도합 2626000엔을 수전개발에 투입하였다. 1940년대까지의 수전개발에 있어서 동북지역 모든 조선족들이 수전농사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한족지주나 일본식민통치자들은 주로 남부출신으로 수전농사 경험이 있는 조선족들을 모집하여 벼농사를 하게 하였다. 이는 1930년대 이후 대규모 집단이민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부 지역 출신으로 한전에 능한 조선족들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한전농사에 종사하였다.

1940년대말까지 벼농사를 할 수 있는 조선족은 한정되어 있었다. 같은 조선족 마을 내부에 있어서도 경상도 등 남부 출신 주민을 위주로 벼농사를 진행하였다. 농약, 비료 등 현대적 농업방식이 도입되기 전에 벼농사는 산출, 수입 등 여러 면에서 한전 작물을 훨씬 초과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전 수전경작에 의한 경제적 차이도 컸으며 지역출신간의 격차도 커지게 되었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은 신분차별화 정책으로 조선족과 타민족간의 민족갈등을 부추겼을 뿐만 아니라 조선족 내부에서도 남 북부 출신을 차별화 함으로써 내부의 갈등을 부추겼다. 이로써 식민지통치에 대한 시선을 내부 갈등으로 분산시켰다.

1945년말에 중국 동북지역의 대다수 수리시설들은 전란과 타민족에 의해 파괴되었고 1946년 수전면적이 대대적으로 감소되었다. 수리시설의 복구와 유지, 벼농사의 보급 등에는 모두 집체로동이 필요하였다. 초기의 수리시설 복구는 주로 벼농사를 하려고 하는 남부출신 조선족들에 의하여 힘겹게 진행되었으며 벼재배 면적도 한정되어 있었다.

수리시설의 복구, 벼농사의 대규모적인 보급은 토지개혁 이후에 시작된 농업 집체화에 의하여 가능하게 되었다. 집체화 시기 정부와 조선족 간부들의 주도하에 진행된 대대적인 수리시설의 건설과 대규모적인 노동력 투입은 과거에 개간할 수 없었던 많은 황무지들을 수전으로 개간할 수 있었다. 농업기술원 제도 도입으로 인하여 작업의 분업이 이루어졌고 벼농사 경험이 없는 농민들도 기술원의 지도하에 벼농사에 종사하게 되었으며 대규모재배가 가능하였다.

1940년대말기 이래 중국 농촌지역에서 진행된 농업집체화 운동은 조선족 마을 공동체의 형성을 힘있게 추진하였다. 조선족 마을 주위에 한족 등 기타 민족들과 잡거하고 있어 조선족 마을은 상대적으로 봉페된 환경에 처하여 있었다. 이 가운데서 여러 지역 출신들로 모인 조선족 마을 구성원들은 토지의 집체소유, 생산대의 집체로동을 기초로 하고 벼농사 수리 체계를 핵심으로 하는 마을 내부의 지연 네트워크와 상호 협조체제를 형성할 수 있었다. 경작지 면적이 증가함에 따라 조선족 마을들의 경제상황이 진일보 개선되었고 경제수익, 생활습관, 언어 등 지역차이도 점차 축소되었다. 집체로동을 전제로 하는 벼농사의 보급은 마을 내부 성원들 사이의 차이를 줄이고 마을 성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유지시키며 연대를 강화시켰다. 사유재산이 손해 받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공동로동과 이익을 공유하는 집체화 체제는 원주민들뿐만 아니라 외지에서 새로 이사온 이주민들도 재빨리 마을 공동체 속으로 융합되어 갈수 있었다.

조선족사회의 이러한 역사적 특점으로 인하여 조선족 마을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재 구성 재 조합되면서도 전통적인 생산방식과 경제형식을 그대로 보전 할 수 있었다. 벼농사를 기초로 한 풍속습관, 윤리도덕,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마을을 단위로 지역사회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조선족의 전통문화는 마을 공동체 성원들의 공동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벼집공예로부터 농경무 등 집체무용에 이르기까지 의식주행에는 벼 문화의 요소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었다. 인구의 대규모적인 이동이 있기 전에 조선족 마을들에서 보통 해마다 혹은 2년에 한번씩 한가한 여름철에 운동회를 조직하였다. 마을 운동회는 모든 촌민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큰 행사로서 마을 성원들의 응집력을 제고하고 전통문화를 전승하는 중요한 형식이 되였다. 그네, 널뛰기, 씨름 등 전통항목 경기 활동들은 조선족 전통을 이어가는 동시에 마을 성원들 사이, 그리고 촌민과 마을 사이의 응집력을 제고시킬 수 있었다. 운동회에서 진행되는 집체무용 등 또한 민간예술을 전승하는 동시에 성원들 사이의 조직 협조능력을 제고시키었다. 이는 벼농사 과정에서의 집체로동, 조직협조성과 일정한 내재적 관계가 있다.

벼농사가 보급되면서 한전문화가 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족마을마다 한전들이 보존되어 콩, 감자, 배추, 무 등 생활에 필요한 한전 작물의 재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부의 한전문화와 남부의 수전문화가 점차 융합되면서 독특한 마을문화를 발전시켜 조선족사회의 문화, 경제, 교육, 정신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족 문화의 융합적 기능을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이러한 융합은 우선 먼저 조선족 사회가 한반도 여러 지역의 문화를 잘 소화하고 융합하여 독특한 마을문화를 생성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노력이 외부의 타 문화 접수와 융합을 용이하게 하였고 조선족 문화를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고 본다.

벼농사의 보급과 민족관계의 개선

벼농사의 보급은 조선족 마을 구성원들을 단합하는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타민족과의 관계개선에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다.

일본 식민통치자들의 민족이간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족과 타민족의 관계는 악화의 일로를 겪고 있었다. 일본통치자들은 일본인은 일등국민, 조선인은 이등국민, 한족 등은 삼등국민으로 취급하였을 뿐 만 아니라 수전개발을 함에 있어서 한족 등 타민족으로부터 헐값으로 토지를 강제적으로 수탈하여 벼농사를 짓게 조선족들에게 대여하거나 팔았다. 이로 인하여 한족 등 타민족들은 조선족이 와서 자신들의 토지가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조선족들을 “얼구이즈”라고 욕하고 있었다. 토지개혁 당시 가장 처리하기 어려웠던 공유지 문제는 바로 이러한 복잡한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이후 한족 등 타민족들은 빼앗겼던 토지를 되 찾으려 했고 조선족들은 모두 한반도로 돌아가라고 공공연히 말하였다. 조선족들이 돌아가게 되면 벼농사에 사용되던 수리시설들도 필요 없다고 하여 고의적으로 파괴하였던 것이다. 조선족들이 토비들의 집중공격대상이 되게 된 것도 이러한 민족관계의 악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조선족들은 일본 식민통치의 가혹한 수탈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통치의 희생양이 되었고 기타 민족에게는 가해자로 오해 받게 되었으며 상당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1946~48년에 걸쳐 진행된 토지개혁은 토지소유관계를 잘 처리함으로써 민족관계를 개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민족평등 정책 등 제도적인 조치가 실시되면서 1950년대 초에 이르러 민족관계는 상당히 완화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남겨진 민족갈등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며 민족간의 저촉적인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조선족과 주변 기타 민족들과의 관계개선에 있어서 벼농사의 보급이 또 한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국 전역에서 지속적인 식량부족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도시농촌 이원호구제도, 양식의 통일구입과 통일분배(징구량) 등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동북지역에서는 식량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시 생산량이 한전의 두 배인 수전을 대대적으로 보급하게 되었다. 수전개발 조건이 구비된 타민족 마을들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전 개발에 들어갔으나 수전농사 경험이 있는 기술원이 거의 없었으므로 기술지도는 조선족 마을에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족 마을들에서는 자체 마을의 기술원과 노동력이 부족한 정황 하에서 기술원들을 파견하여 무상으로 장기적인 기술지원을 하였다.  한족 등 기타 민족들은 찬물에 맨 발을 넣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동북지역의 4월은 얼음이 금방 녹은 시기여서 매우 차지만 써레 파종 등은 이 시기를 놓치면 일년 농사를 망치게 된다. 추운 봄날 한족 등 기타 민족들이 기피하는 춘경은 조선족 기술원들이 맨 발로 논밭에 들어가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1963년에 고무장화가 나와서야 이러한 상황이 개선되었다. 장기적이고 무상으로 이루어진 기술지원은 조선족과 주변 기타 민족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하였다. 벼농사 기술교류, 수리시설의 공동운영, 물 자원 조절 등 수리시스템을 통한 지역 공생 관계가 형성되었고 상호 신뢰관계를 구축하게 되었다. 국가의 민족평등정책과 서민차원에서의 벼농사를 통한 상호교류, 상호의존관계가 있었으므로 하여 조선족들은 타 민족과의 관계를 보다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었고 모범민족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조선족 문화는 벼농사를 기초로 주변의 다양한 문화를 풍부하게 수용하여 융합하면서 발전시켜왔다. 조선족 인구의 대규모적인 이동과 함께 대다수 사람들이 벼농사를 그만두었으며 조선족사회도 농경사회로부터 산업화 사회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벼문화를 기본 특징으로 하는 조선족사회의 공동성은 사람들의 이동과 산업화에 따라 소실되지 않았다. 이는 지연네트워크에 의한 인간관계중시와 집단적 모임을 중시하는 문화로서 사람들은 모임에서의 신체적 교류를 통하여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벼농사 포기로 인한 조선족 사회 해체 위기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집체로동으로 인한 구성원사이의 연대감 강화와 공동체로의 융합기능이 약화되면서 조선족 사회가 또다시 1940년대의 상황을 재현하지 않는냐 하는 우려감도 없지는 않다. 지역네트워크가 중시되지만 새로운 조선족 집거지에서 여러 지역 지연네트워크를 융합할 수 있는 기능은 미약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족 사회가 장기간 중국문화와 한국문화(한반도문화)사이에서 나는 누가인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여 왔다. 과거 중국이라는 울타리안에서는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자체로만 동질성 확인이 가능하였다. 이는 중국 동북지역에 정착하면서 벼문화에 기초한 지연네트워크를 통하여 문화공동성, 동질성을 재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지역 한민족과의 접촉이 일상화 되어 있는 글로벌 시대에 조선족으로서의 정체성 확인이 오히려 어려워졌다. 공동한 언어, 기초음식문화, 예의범절을 공유하면서도 기타 지역 한민족과 동질성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중국국민이면서도 한족 등 기타 민족과 다른 독립성을 감지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족사회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외부로부터의 요인이 강하게 기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부적 시각으로 볼 때 조선족 문화가 인구이동과 집단적인 벼농사라는 틀에서 지연적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고, 글로벌 인구이동과 함께 지연적 네트워크를 다시 융합할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어 있음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알맞은 여러 지역 출신 조선족들을 융합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의 창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안성호
(지행자 2015년 4.1,4.3일자에 첫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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