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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기사 입력 2021-04-12 06:18:49  

녀자로 산다는 것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10년 동안 일한 방송작가답게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사실적이고 공감대 높은 스토리로 표현하는 데 뛰여난 작가는 이 소설에서 30대를 살고 있는 한국 녀성들의 보편적인 일상을 완벽하게 재현한다.

주인공 ‘김지영’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고백을 한 축으로, 고백을 뒤받침하는 각종 통계자료와 기사들을 또 다른 축으로 삼는 이 소설은 1982년생 김지영씨로 대변되는 ‘그녀’들의 인생 마디마디에 존재하는 성차별적 요소를 핍진하게 묘사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제도적 성차별이 줄어든 시대의 보이지 않는 차별들이 어떻게 녀성들의 삶을 제약하고 억압하는지 보여준다.

녀자의 권리가 보장받는 시대, 그러나 여전히 ‘녀성’이라는 조건이 굴레로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 녀자의 인생을 다룬 소설은 조용한 고백과 뜨거운 고발로 완성된 새로운 페미니즘 소설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과 자료로 이루어진 ‘목소리 소설’이다. 맘충이, 녀혐, 메갈리아 등 련일 새롭게 등장하는 페미니즘 화두를 관심이 있게 지켜보는 독자라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고 저마다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엄마를 뜻하는 ‘맘’과 벌레를 뜻하는 ‘충’의 합성어인 ‘맘충’은 제 아이만 싸고도는 일부 몰상식한 엄마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러나 ‘맘충’이란 호칭은 육아하는 엄마 대부분에게 무차별적으로 사용되며 많은 녀성들에게 공포심을 주고 상처를 안겼다. 뿐만 아니라 이 표현은 육아가 마치 녀성의 일인 것처럼 인식되게 함으로써 성차별적인 시선을 고착화하는 데도 일조해 론난의 대상이 됐다.

책은 2014년말, 한국에서 촉발된 ‘맘충이’ 사건을 목격한 작가가 녀성, 특히 육아하는 녀성에 대한 사회의 폭력적인 시선에 충격받아 쓰기 시작한 소설이다. 소설을 쓸 당시 작가는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전업주부였다. 온라인상에서 사실관계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만 놓고 엄마들을 비하하는 태도에 문제의식을 느낀 작가는 지금 한국을 살아가는 녀성들의 삶이 과거에서 얼마나 더 진보했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지 질문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기로 했다.

슬하에 딸을 두고 있는 서른네살 김지영씨가 어느 날 갑자기 이상증세를 보인다. 시댁식구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친정엄마로 빙의해 속말을 뱉어내는 통에 시댁 식구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드는가 하면 남편의 결혼 전 애인으로 빙의해 그를 식겁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김지영씨의 정신상담을 주선하고 지영씨는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김지영씨의 이야기를 들은 담당의사가 그녀의 인생을 재구성해 기록한 리포트 형식이다. 리포트에 기록된 김지영씨의 기억은 ‘녀성’이라는 성별 기준으로 선별된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발화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녀가 선택한 이야기들이 바로 일생에 거쳐 ‘녀자이기 때문에 받아왔던 부당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고백은 제도적 차별이 사라진 시대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내면화된 성차별적 요소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지나온 삶을 거슬러올라가며 미처 못다한 말을 찾는 이 과정은 지영씨를 알 수 없는 증상으로부터 회복시켜줄 수 있을가?

상담은 자기 고백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소설의 백미도 김지영씨의 자기 고백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세밀한 심리묘사이다. ‘그때 그 상황’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차분히 쏟아내는 그녀의 말들은 ‘김지영’을 이 시대 녀성의 대변자로 삼기에 충분할 정도로 자세하고 보편적이다. 특히 김지영의 이름은 이 시대 젊은 녀성들의 삶을 보편적으로 그리기 위한 작가의 전략적 선택이기도 하다. 김지영이라는 개인의 고백을 30대 녀성, 나아가 이 시대 녀성들의 고백으로 볼 수 있기도 하다.

김지영으로 대변되는 젊은 녀성들에 대한 섬세한 심리묘사가 담겨져있는 책의 일부분을 공유한다.

‘선배는 평소와 똑같이 다정하고 차분히 물었다. 껌이 무슨 잠을 자겠어요,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김지영씨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영업중인 빈 택시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씨는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가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랭면그릇에 술을 쏟아버렸다.’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오히려 그 순간들이였다. 김지영씨는 충분히 건강하다고, 약 같은 것은 필요없다고, 가족계획은 처음 보는 친척들이 아니라 남편과 둘이 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니예요, 괜찮아요 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돼?’

보고서 형식으로 쓰인 소설의 에피소드들은 무척이나 사실적이다. 어린시절, 학창시절, 회사생활, 결혼생활에 이르기까지 녀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이 경험들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많은 공감대를 형성한 사례들을 채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들과 함께 등장하는 각종 사실들은 지난 20여년 동안의 한국의 ‘성차별 력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신연희
연변일보 2021-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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