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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안중근과 그가 다녀간 장동학교
기사 입력 2015-09-04 08:36:16  

올해는 광복(光复)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고 중국 항일전쟁 및 제2차세계대전, 동아시아와 전 세계인의 반파쑈전쟁승리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뿐만 아니라 1905년 일본이 강박적으로 《을사륵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자주권을 빼앗은 11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라 잃은 우리 민족은 36년간이나 일제의 통치를 받아왔었다. 우리 수많은 조선인 애국지사와 독립운동가들은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일본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또한 중국의 해방을 돕기 위하여 발톱까지 무장한 일제와의 판가리싸움에서 자기의 귀중한 생명까지 바쳤으며 드디여 그렇게도 갈망하던 광복을 끝끝내 맞이하게 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여러 민족들은 기쁨에 넘쳐 《만세!》를 웨치고 또 웨쳤다. 그러면서도 그토록 바라던 광복도 보지 못한 순국렬사들을 한없이 그리면서 또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중국과 조선반도 나아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있는 애국지사 안중근의사를 다시 한번 첨앙하고 그가 신학을 꾸리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갔던 룡정시 덕신향 장동소학교를 소개하려고 한다.


필자는 한국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안중근기념박물관》에 있는 자료와 《연변문사자료》등 문헌자료들을 참고하면서 이 글을 쓰게 되였다.《우리민족 애국지사 안중근(安重根)은 1879년 9월 2일 조선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清溪洞) 안태훈(安泰勋)의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의 어머니는 조마리아녀사이고 그의 본관은 순흥(顺兴)이며 아명(儿名)은 응칠(应七)이라는 괴상한 이름자를 가졌다. 그렇게 부르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깃들어있었다.

안중근이 태여나자 그의 가슴과 배에는 7개의 점이 있었다. 그 신기한 점으로 하여 친척들은 물론 전 동네에서까지 몰려들어 구경하였다고 한다. 안중근의 부모들은 태여난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을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던 끝에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여났다는 뜻으로 《응칠》(应七)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후는 그가 자라면서 자(字)로 사용하였다.

안중근의 가정은 그 당시 할아버지 안인수(安仁洙)와 아버지 안태훈의 부지런한 노력으로 하여 황해도에서 부자집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또한 교육을 중시하는 가문으로도 소문이 났다. 그들은 잘산다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고 가농(家农)들을 잘 돌봐주었다고 한다.

안중근은 어려서 할아버지와 군수인 아버지한테서 한학(汉学)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칼과 몽둥이를 들고 같은 또래들과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고 한다. 16세 되던 해에 그의 아버지 안태훈은 글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1895에 카톨릭교에 입학하여 신식문화를 접하고 카톨릭 신부한테서 프랑스어를 배워 도마[Thoma•多默 ]라는 세례명을 얻었다고 한다. (군수는 중국의 현장임)<필자—주>

그후 가정을 이룬 안중근은 부모님한테 페를 끼치지 않으려고 자기의 두손으로 생활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1904년 홀로 평양에 와서 석탄장사를 하였다. 말로는 석탄장사를 하여 큰 돈을 벌수 있다고는 하였지만 돈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庶民)한테 석탄을 공짜로 주다싶이 하여 밑지는 장사를 하였던것이다.

일로전쟁에서 승전한 일제는 조선 리조정부를 협박하여 1905년 《을사조약》(乙已勤约)을 강제로 체결하였다.이것을 보자 분을 참지 못한 안중근은《나라가 위기에 처한 앞에서는 종교도 없다.》면서 자기가 경영하던 석탄상점을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1906년 삼흥학교 [三兴学校:후에 오학교(五学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义学校)를 인수하여 한시기 교감으로 있으면서 인재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국운(国运)이 극도로 기울어지자 합법적인 방법으로 나라의 운명을 구할수 없다고 생각한 안중근과 가족, 친척들은 1907년 로씨아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1908년 안중근은 전재덕(全在德)의 지휘하에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韩义军参谋中将)겸 특파독립대장(特派独立大将)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아령지구(俄领地区)사령관 자격으로 엄인섭(严仁燮)과 함께 100여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들어가 일군(日军)과 격전을 별렸다. 그러나 일군과의 싸움에서 병력과 무기차이로 승리하지 못하고 도로 돌아올수밖에 없었다.

그후 안중근은 노에푸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报)의 탐방원(探访员)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爱国)사상을 고취하는데 진력하였다. 1909년애국지사 안중근은 12명의 동지들과 함께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하고 동의단지회(同义断指会)를 결성하였다.

이해 10월말,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가 로씨야재무상(财务相) 코코프체와 회담하기 위하여 만주 할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때 누구도 모르게 계획을 세운후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안중근은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우덕순(禹德淳), 조도선(曹道先) 동지와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뜻을 같이하였다. 그리고 유동하(刘东河)를 번역으로 내세우고 행동에 나섰다.

10월말, 할빈의 날씨는 매우 쌀쌀하였다. 그때 할빈으로 가기전에 경비가 없어 곤난을 받게 되였는데 리강(李岗)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할빈으로 행하였던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한 그들은 경계가 심한 할빈역에 잠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내릴 지점을 정확히 판단한 안중근은 때를 기다렸다.

이토 히로부미를 실은 렬차가 서서히 역에 들어섰는데 안중근의 판단과 맞아떨어졌다. 역두에서 로씨야군의 군례를 받은 이토히로부미와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총격할수 있는 기회가 되자 안중근은 가슴에 품고있던 권총을 재빨리 꺼내들었다.안중근은 굳어진 습관으로 총탄알에 십자(十字)를 새기며 방아쇠를 당겼다.《땅! 땅! 땅!》 방아쇠를 당겼다.

돌연적인 총소리에 로씨아 경찰과 일본 방문객들은 아우성을 치면서 허둥대자 역두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였다. 정통을 맞은 이토 히로부미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그자리에 쓰러졌다. 죽음을 각오한 안중근은 뛸념도 하지 않고 재차 할빈 총령사 도시히로 (川上俊彦) , 국내대신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郎), 만철리사 (满铁理事) 다나까세이타로(田中太郎)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로씨아 경찰에 체포되였다.  

애국지사 안중근은 로씨야 경찰에 압송되여 일본관헌에 넘겨졌으며  려순(旅顺)감옥에 수감되였다. 려순감옥은 1902년에 제정로씨아가 만들고 1907년에 일본이 확장시킨 부지면적이 22만 6000평방메터에 달하는 전 만주에서 제일 큰 감옥이다. 옥중에서 안중근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동양평화론》(东洋和平论)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뛰여난 서예솜씨로 휘황한 유묵(遗墨)글자를 썼다. 그 사례로 보면 중국 산해관에 있는 《천하 제일 강산》(天下一江山)이란 붓글씨도 바로 안중근의 필체이다.

순국직전 안중근이 우리 동포들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을 보기로 하자. 《내가 나라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동안 해외에서 풍찬로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여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여한이 없겠노라.》

1910년 2월 14일, 안중근은 재판에서 사형에 선고되였고 이해 3월 26일 형이 집행되였다. 안중근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사건이 당시 세계보도매체의 특대뉴스로 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로씨아에서는 영화로 제작하여 모스크바, 카산, 바쿠(레닌의 고향) 등 지에서 상영되였으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때 영화는 약 4분-6분으로 상영되였으며 필림길이가 약 120-300메터였다. 그런데 영화속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격살되는 가장 중요한 장면이 없어진것이다. 그때 로씨아 40대 청년인 코브체크라는 촬영사가 찍었는데 일제에 매수되여 거액의 돈을 받고 필림원판을 팔아넘겼다고 전해지고있다.

필자는 한국 KBS방송국에서 방영한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았는데 격사장면을 삭제했는지 볼수 없었다. 당시 프랑스의 촬영가도 촬영하였다는 설도 있었는데 사주받고 팔아넘긴 원판 필림이 일본에 있는지 아니면 로씨아에 있는지 아직까지 미결이다.
애국지사 안중근은 31세 생애를 마치기 직전《내가 죽으면 할빈에 묻었다가 다시 조국이 광복을 맞은 그때 조국땅에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유해를 찾는 일을 두고 중국정부와 한국정부는 공동으로 추진하기에 힘쓰고있으니 애국지사의 유언이 조만간에 실현되이라 믿는다.

한국정부에서는 안중근의사의 공훈을 기리여 1962년 건국훈장과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으며 생전에 손문(孙文)<손중산의 원명은 문이다>도 안중근을 높이 평가하는 친필을 남겼다.

1963년 6월 주은래는 안중근의사를 이렇게 평가하였다.  《중조 두 나라는 다같이 동시에 제국주의 침략을 받았다.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되고 중국은 여러 제국주의 반식민지로 되였으며 부분적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중조량국인민은 혁명적 동지관계를 맺었다. 갑오중일후 안중근의사가 할빈역에서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두 나라 인민이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였다.》(주은래의 《중국력사에 관한 담화》에서-참조)

중국의 력사학가 량계기(梁启起)는 1935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안중근에 대한 실화를 썼으며 저명한 희곡작가이며 시인인 전한(田汉)은 1938년 안중근의사를 모델로 극을 창작하고 총연출까지 맡아 공연하였던것이다. (전한은 우리 나라 국가 작사자임-필자 주)
조선의 원 국가 주석 김일성은 일찍부터 안중근의사를 수립하기 위하여 력사연구원들에게 안중근의 문물과 력사자료를 수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후 력사학가들은 안중근에 대한 많은 귀중한 자료들을 수집하였으며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쏘다》는 영화까지 나왔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조선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들을 참고하고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유명한 작사자이며 작곡가, 가수인 박창호(일명 윤극영, 반야월 등 10여가지 필명을 갖고있다) 의 대표작품 <반달>이라는 노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전국 한족소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였다. 그는 (1917년-2012년)생전에 5000여수의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부르기까지 한분으로서 《번지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등 주옥같은 노래들을 창작하였으며 중국에 오래동안 머물던 기간에 많은 노래들을 창작하였다.

할빈에 있을 때 박창호선생은 《송화강 노래》, 《노래하자 하르빈》을 친히 작사, 작곡하고 부르기까지 하여 많은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 두노래가 바로 안중근을 칭송한 첫 노래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제목과 가사를 고쳐 《송화강 노래》를 《한강노래》로, 《노래하자 하르빈》을 《노래하자 서울》로 부르고있다.

지난해 중국정부에서는 안중근의사의 영웅정신을 기리기 위해 할빈기차역에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세웠다. 올해초까지 50여만명에 달하는 중국인과 외국인들이 이 기념관을 찾았다고 한다. 올 3월 26일에는 또 사상 처음으로 중국정부와 한국정부간에 공동으로 안중근의사 순국 105주년 추모행사를 대련시 려순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진행하여 그의 정신을 기리였다.

안중근에 대한 글을 집필하면서 필자는 일부 유명 작가와 교수들을 찾아뵈였다. 그들은《안중근이 독립운동을 한 시간이 길지 않은것은 사실이지만 력사인물을 쓰면서 꼭 허구를 피면해야 하며 인용하는 문장의 출처와 주해를 밝히면서 관련 글을 써야만이 잘 쓴 문장이라고 할수 있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필자는 과거에 안중근에 관련하여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다. 안중근은 중국 훈춘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했으며 선에서 말하다싶이 엄인섭과 함께 두만강을 건너가 일제군과 간간이 전투를 벌이군 하였다. 덕신향 영동에서 하루밤 묵고 그 이튿날 문암골 석분에서 회경촌으로 가는 첫 어구에서 인형을 만들어놓고 사격연습을 하였다는 설도 있다.

어째든 안중근에 대한 말들이 많이 돌기는 하였지만 필자는 발굴능력이 부족한탓인지 문헌에서 그의 다른 사적들을 찾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떠도는 말을 듣고 문헌에 남길수는 없어 믿음성이 있는 문헌자료들을 참고하였다.

력사사실과 력사인물들은 기본상 우리 선배들이 문헌과 원시자료에 남겨놓았다. 아래에 소개하게 되는 룡정시 덕신향 장동마을에 대한 문장도 애국지사 안중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녀갔다는 문헌기재에 근거하여 쓰게 된것이다.

연변문사자료에는 《1905년 가을에 애국지사 안중근이 해삼위(海参崴)로 가는 길에 장골에 들렸다.》고 적고있다. 문헌에는 이 마을의 국민회 책임자 마병호(马炳浩)를 만나보고 그날 땅거미가 질무렵에야 장골을 떠나 영동막치기 상우동(지금의 룡정시 덕신향 영동촌 12대이고 과거의 창동을 지금은 장동 혹은 장골이라고 부른다) 황씨댁에서 하루밤을 류숙하고 이튿날 새벽에 길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가 장동에 온 목적은 국민회 회원들이 농민들을 동원하여 신학을 빨리 꾸리고 반일운동을 일으키도록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문헌에는 《안중근이 돌아간 뒤 그의 민족교육주장을 접수한 창동농민들은 인차 국민회 책임자 마병호의 인솔하에 안중근의 지행대로 망국노의 운명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는 뜻을 품고 세곳의 서당을 합쳐 세채의 8간집 아래웃방과 사랑칸을 내여 신학을 꾸리고 개학식을 거행하였다.》고 적고있다.

안중근이 장동마을에 오게 된데 대해여 문헌들을 찾아보면《을사륵약》이 체결된후 조선반도의 독립운동가들은 만주 여러 지역에 와서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때 반일국민회 회원이 많이 집중된 곳이 화룡현 팔도하자 장동골이였기때문이라고 적고있다. 안중근이 철천지원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사한 소식이 장동에 전해지자 장동마을 사람들은 어느 지방 사람들보다 기쁨에 들끓었다고 문헌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격사하였다고 일제의 침략야망을 좌절시키지는 못하였다. 일제는 드디여 1910년 8월 29일에 강박으로《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였다. 나라를 잃은 울분을 참을수 없는 온 겨레들은《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声大哭)을 하게 되였다. 《시일야 방성대곡》은 한일합방후 남궁역이 발행하는 서울《황성신문》에서 장지연(张之渊)이 쓴《이날을 목놓아 통곡한다》는 론설을 실어 한일합방조약체결의 경위를 폭로한것이다. (필자-주)

안중근의사의 지향대로 꾸려진 장동학교는 애국지사들을 양성하는 학교로 자리잡았다. 하여 룡정에 있는 일제경찰들은 늘 출동하여 국민회 책임자 마병호의 집을 불사르고 마병호를 비롯한 진보적인 선생들을 학살한후 창동학교를 불태워버렸다. 장골사람들은 학살된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받들고 불탄 페허우에 또 학교를 짓고 학생들한테 반일교육을 계속 진행하였다.

1920년 이 학교의 교원으로 있었던 박창익(朴昌益)선생(화룡현 와룡중학 1기졸업생 조선공당원임) 이 지은 저항시 《자유를 찾아서》를 읊어보기로 하자.

《나는 자유를 찾아서
강가에서 조약돌을 뒤집어봐도
호천포 들어서면서
길가에 있는 우물을
자꾸 자꾸 들여다봐도
자유는 없었다
나는 문암골을 지나면서
좌우 산옆을 살펴봐도
자유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금 발붙인 이곳에서
자유를 찾으리라고 속다짐하였노라》

(호천포는 지금의 개산톤진 회경촌인데 호천개라고도 불렀으며 문암골을 룡정시 덕신향 석문촌에서 개산툰으로 가는 량 옆산을 말함.)<필자-주>

1927년 5월, 룡정에 있는 일제경찰들이 암암리에 박창익선생을 체포하려다가 놓쳐버렸다. 그는 로씨아로 망명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장동골사람들은 박창익선생이 참가하지 못한 환송회를 가졌다. 그의 가족과 형님만 참가하는 환송회에서 장골사람들은 간단한 기념품을 선물하고 비밀리에 돈을 모아 소수레 한대를 사서 그를 우차몰이군으로 가장하고 전가족을 데리고 훈춘을 거쳐 로씨아로 가게 하였다.

로씨아에 망명한 박창익선생은 조선공산당원으로부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일제와 싸우는 투쟁에 참가하여 계속 저항시편들을 썼다. 후에 쏘련공산당원으로 된 박선생은 또 쏘독전쟁에 참가하였고 광복을 맞은 그때도 다시 고향인 중국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1954년 5월, 박창익선생은 장동학교 책임자한테 문안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한다. 1920년초부터 저항시들을 발표한 그는 우리 연변의 초기 저항시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창익선생은 1927년초 창동학교를 떠나기 직전에 교가를 지었다고 한다.

흰뫼가 우뚝코 두만물 흐르는
넓다란 벌판에 형제의 믿음과 힘을 모디여
배움집을 세웠으니 창동
동천에 붉으레 돋는 해같이
젊은 생명에 힘을 주노라!
보아라 보아라 이 세상을 보아라
주림에 우는자 광야에 엎드려진 그 참경
오늘까지 사랑없는 이 땅
즐거운 동산을 이룰양으로
젊은 생명에 힘을 주노라!

후렴: 우리의 힘 될이 위해
북돋다주고 길러주나니 같이 기르자 동무야
창동을 창동을

그 당시 이 학교의 교가는 민족성도 살리고 사회주의운동을 의미하였으며 학생들과 진보적인 교원들의 저항정신을 구가하여 높은 찬양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이 학교의 진보적인 교원 김억(金亿) 선생의 저항시 일부를 또 보기로 하자

《… 핀꽃보다 피려는 꽃이 아릿다워라
핀꼿이 질 때 피려던 꽃이
더 아릿다워라
원쑤들이 울 때 우리 겨레들이 웃으리라…》(이상 연변문사자료에서 참조)

안중근의 지향대로 그 뜻을 이어온 장동사람들과 학교의 사생들은 구중국의 지방당국과 일제의 2중3중 통치와 탄압으로 그토록 어려운 환경속에서 거듭되는 곡경과 좌절에도 굴함없이 민족적 자주교육을 진행하여왔다. 하여 《일제침략자들을 반대하여 궐기한 혁명투쟁마당에서도 장골사람들과 학생들은 불굴의 기개와 불타협 정신으로 널리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장동촌은 또한 중국조선민족의 축구발원지이기도 하다. 1905년 서울의 로선생이라는분이 축구공을 갖고와서 이 학교에 보급을 시켰다고 한다. 그 당시 창동의 학생들과 장년팀은 화룡현(지금의 룡정시)축구대회에서나 간도성(지금의 연변)축구대회에서 1등 할 때가 많았다. 팀의 선수들은 모두 창동출신이였으며 축구팀가운데서 많은 우수한 선수들이 배출되여 간도성팀과 전 만주구팀선수로 소문놓았다.

그 돌출한 선수사례를 든다면 전 만주국은 물론 중국과 조선반도, 일본전역에까지 소문놓았던 꼴키퍼 리혜봉(장동출신), 방어수 정룡수(장동출신)와 같은 선수들이다. 리혜봉선수와 정룡수 두선수만이 오로지 해방전 중국국가대의 축구선수로 되였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체육사》<참조>. 그들은 축구명장 박익환(덕신향 남양촌 출신)과 애국지사 안중근의 친조카 안원생과 함께 중국과 조선반도, 일본그라운드를 누빈 축구명장이다.

여기에 또 사례를 든다면 1935년 5월 룡정에서 진행된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창동축구팀이 또 우승을 따내자 룡정일본총령사는《저자들은 어느 고장 사람들인가?》고 묻고나서 장골농민들이라는 대답에 《장골사람들이 죽기두 많이 죽었는데 또 무슨 사람이 있어서 저렇게 뽈을 잘 찬단말인가?! 참 괴상한데…》하고 뇌까렸다고 한다.(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체육사에서) <참조>

필자는 그제날 축구운동을 쓴 력사문헌과 항일투쟁사들을 읽어보면서 항일운동과 축구운동이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였다. 《우리 민족이 왜 축구를 즐겨하는걸가?》하는 의문이 내내 풀리지 않았으나 그 원인을 오늘에야 비로서 알게 되였다. 즉 우리 민족은 손을 쓰기보다 발로 차는 습성이 있는것도 사실이지만 그 보다도 36년간 일제통치를 받아온데서 축구를 더 즐기게 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던것이다. 일제와 싸우기 위하여 축구운동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의지를 키웠으며 비밀쪽지를 나르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혁명의 도리를 선전하기 좋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다보니 축구운동이 활발히 전개된 곳일수록 항일의 봉화가 세차게 타올랐던것이라고 믿고싶은것이다.

그 사례를 든다면 룡정의 덕신향, 왕청의 대흥구, 룡정의 사광사(지금의 개산툰), 안도 등 지방의 축구운동이 활발하였다. 또 이런 곳에서 많은 애국지사와 항일투사 그리고 군사장령과 요인들이 많이 배출되였다.

광복전까지만 해도 60여세대밖에 안되는 이 마을에 안중근의사의 도움으로 장동학교가 세워지면서 마을의 애국지사, 진보적 사생 40여명이 일제경찰들에게 학살되였다고 연변문사자료는 적고있다. 일본경찰들은 늘 장동, 룡암, 금곡에 밀정을 잠입시켜 반일투사들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한것은 장동에는 애국지사들과 반일사상을 가진 교원과 학생들이 많았고 또 룡암촌과 금곡촌에도 항일투사들이 많았기때문이였다.

그 사례를 든다면 김일동지(일명 박덕산이라고 함 룡암사람, 후에 조선내각 제1부수상), 한익수동지(원명 한세익, 룡암사람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국장), 항일련군 제2군 6사 7퇀 정위로 있었던 리동걸동지(룡암사람 1945년 3월초 서울서대문감옥에서 희생), 김명숙동지(원명 김옥덕 룡암사람 조선녀성동맹위원회 부위원장) 등 간부들이 배출되였다.

금곡촌에는 중공화룡현위 제1임서기인 채수항동지(금곡사람), 제5임서기인 김일환동지(덕신향 숭민사람, 일명 김성호), 김일환서기의 적극적인 지지하에 항일투쟁사에서 처음으로《연길작탄》을 제조한 손원금동지(조선인민군 대장), 쏘독전쟁시의 쏘련녀성영웅 조야나 해방전쟁시기에 산서성 문수현에서 장렬하게 희생된 류호란동지들보다 퍽 일찍 나젊은 생명을 항일투쟁에 바친 녀항일투사 리계숙동지(김일환의 부인) 등 투사들이 있다.

간고한 나날 장동학교의 애국적 교원들은 정탐들의 눈을 피해가며 여러가지 형식으로 학생들에게 안중근의사의 반일정신을 선전하였다.이 학교의 진보적인 교원 리종환선생(李钟焕 룡정영신중학교 졸업생)은 1927년 안중근의사를 칭송하고 일제를 반대하는 재담을 엮어냈다. 당년에 중국과 조선반도에 널리 알려졌던 이 재담은 지금도 나이 많은분들은 기억하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소학시절 선생님한테서 배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재담을 배운후 학생들은 몇이 모이기만 하면 재담으로 유희놀이를 하군 하였다.

아래에 문헌에 씌여진 재담내용을 그대로 적어본다.

《1. 일본놈 2. 이등박문. 3. 삼천리강산을 삼키려 날뛰다 4. 사처로 찾아다니던 안중근이 5. 오랫동안 기다리던 할빈역에서 6. 육혈포로 쏴넘겨놓으니 7. 칠성구멍으로 피를 토하며 8. 팔짝팔짝 죽어가는 이등을 9. 구름같이 모인 사람들 앞에서 디디고 만세 3창(주 3창은 세번 만세를 웨친다는 뜻) 10. 열번 다시 죽어도 속만 씨원해라!》

장동학교의 진보적인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반일교육을 고취한데서 학생들의 반일정서가 점점 높아져갔다. 그래서 룡정이나 팔도하자(덕신)에서 일어나는 반일시위에는 제일 먼저 앞장서 판가리싸움을 벌렸다. 일부 학생들은 총에 맞아죽거나 중상을 입기도 하였던것이다.

세계적으로 유태인이 교육을 제일 중시하는 민족이라 할진대 그 버금으로는 우리 조선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식교육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장골사람들은 《빌어먹더라도 자식을 공부는 시켜야 한다.》 《하루 세끼에 두끼만 먹고 한끼는 남겨 자녀를 공부시키자.》는 우리 민족 교육전통을 이어가면서 자식들의 글공부에 애썼던것이다. 일제는 세번이나 창동학교를 불태워버렸다. 학교로 갈수 없게 된 학생들은 야외에서 공부할지언정 일본인이 꾸리는 보통학교에는 한학생도 가지 않았다고 문헌에 적혀있다.

학습열이 높은 장골사람들은 후대들의 학습을 위하여 불탄 그 자리에 계속 학교를 짓군 하였다. 광복을 맞으면서 페허된 그 자리에 또 학교를 짓기로 하자 돈과 자재들이 부족되였다. 그러자 장동사람들은 힘을 합쳐 돈이 될만한 물건들을 내놓았으며 갓 시집온 각시도 자기의 혼수감을 선듯이 내놓아 학교를 짓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학교를 지을 기지가 없자 자기의 땅도 무상으로 내놓기도 하였다. 그래도 돈이 부족하자 집집이 닭알을 지원하였다.

지금은 닭알 한개 값이 극히 적지만 그때는 성냥과 소금을 사는데 큰 보탬이 되였다. 그렇게 세워놓은 학교를 《달걀학교》라 부르기도 하였다. 이토록 간고하게 학교를 세운 이야기와 력사자료는 지금까지도 길림성교육청 당안국에 보관되여있다. (올해 85세인 원 장동촌서기 리하익(李河益)이 학교 교원으로 있을 때 학교당안을 보려고 장춘에 가서 직접 본 일이다.)

애국지사 안중근의 지향대로 세워진 장동학교는 일제 침략자들에 항거하여 한결같이 일떠선 겨레의 얼이 슴배인 배움터였고 또 그 얼을 이어받은 인재들을 육성하여 그 빛을 내였다. 그리하여 장동학교와 거리가 먼 곳에서도 학부모들은 지식성과 애국성이 높은 이 학교에 자식들을 보냈는데 부처골(지금의 지신진신화촌), 허문리(지금의 동성용진 장남촌), 성암, 영동, 안개골 등지의 학생들이 이 학교에 다녔다고 문헌에 기재되여있다.

지금은 조선족의 인구소실로 하여 창동학교는 완전히 문을 닫았지만 안중근의사의 불굴의 정신과 더불어 우리 민족 교육사에 영원한 한페지로 남아있을것이다.



글 김원범 사진 리광평 제공
길림신문 2015-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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