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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 부사령 박대호와 그 가족 이야기
기사 입력 2018-08-21 10:54:54  

박대호는 조선혁명군 부사령으로 지난 20세가 20, 30년대 24년간 동북의 환인 관전 일대에서 피어린 반일투쟁을 견지하며 일본군국주외와 불요불굴의 투쟁을 견지해온 항일투사이다. 그의 사적은 ‘3강’(압록강, 혼강, 부얼강) 지역에 널리 전해지고 있으며 현재 그의 묘소는 환인만족자치현 괴마자진 상전자촌 남산에 모셔져있다. 올해 광복절을 계기로 기자는 박대호의 손자 박홍민을 인터뷰하여 박대호와 그의 가족 이야기를 적어본다.

‘3강’류역에 위엄을 떨치다

박대호(朴大浩)의 자는 상춘(相春), 호는 춘하(春河)이며 별명은 대호(大虎,大豪,大镐)이다. 한시기에는 박청암(朴青岩)이라고 하였다.

박대호는 1895년 한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고평동의 한 농민가정에서 4형제중 셋째아들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당에서 글을 배우고 한자를 익혔다. 그의 청소년시기 조선이 일제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되자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은 독립투사들이 여기저기서 반일의병운동을 일으켰다. 1919년 초 박대호의 부친은 가족을 데리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 료녕성 관전현 보달원 고령지로 이주하였다. 이 시기 압록강을 건너 관전, 환인, 집안, 흥경 등지에 이주해온 조선사람이 3만여명이나 달하였다. 3월1일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환인, 흥경 등 여러 곳에서 3.1운동을 지지하는 반일집회가 있었다. 박대호도 이 반일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여 ‘독립사상 고취자’ 란 죄명을 쓰고 20일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그의 동생과 각계 애국인사들의 도움으로 석방되였다.

1919년5월 박대호는 집을 떠나 일찍 소문을 들어오던 최시흥이 령솔한 의주 천마산대(天摩山队) 독립군을 찾아갔다. 평안북도의 의주, 귀성, 삭주 3개 군 접경에 있는 천마산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하였다 하여 천마산대로 불리운 부대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가장 용맹하여 철마병영(铁马兵营)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박대호는 최시흥(崔时兴), 최지풍(崔志丰), 박응백(朴应伯) 등이 거느리는 천마산부대에서 더욱 많은 혁명진리와 적을 무찌르는 기예를 배웠다. 당시 량세봉도 천마산부대에 있었다.

1920년 천마산부대는 첩첩한 적의 포위를 뚫고 오동진이 인솔하는 대한광복군총영과 합병되였으며 박대호는 소대장, 후에 륙군주만참의부에서 제5중대 대장 겸 선전부장으로 되였다. 이 기간 박대호는 량세봉과 함께 압록강 량안의 국경선에서 활약하면서 일제의 군부와 경찰서를 빈번히 습격하였다. 박대호 중대장은 부하를 거느리고 관전, 환인, 신빈, 집안 등 지로 다니면서 령활한 유격전술로 일본경찰서를 습격하고 교통을 파괴 차단하고 통신련락선을 교란하였으며 적들의 무기탄약을 로획하고 일제 앞잡이들을 타격하였다.

1928년9월 길림교구 신안둔에서 정의부(正义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参义府) 각 대표가 모여 국민부(国民府)를 구성하고 당해 12월에 당조직련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칭, 혁명군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하였다. 1931년 12월19일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중앙은 신빈현 하북 서세명 집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하다 일본경찰들에 포위되여 요원들이 체포되면서 국민부조직은 엄중한 타격을 받았다. 그뒤 긴급중앙회의에서 량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김학규를 참모장으로 하였는데 이때 박대호는 조선혁명군 제1로군 사령관에 임명된다.

1932년 동변도보안사령부 제1퇀 당취오가 환인현에서 ‘료녕구국위원회 군사위원회’와 ‘료녕민중항일자위군총 사령부’를 설립하였다. 량세봉은 새로운 항일투쟁의 국면을 개척하기 위하여 료녕민중항일 지위군 총사령 당취오를 만나 련합하여 공동히 항일할 것을 성명하였다. 이에 당취오는 조선혁명군 제1로군 박대호 부대를 료녕민중가위군 제1로군 당옥진부대의 특무대로 하는 등 조선혁명군 각 부대를 료녕민중자위군 각급 조직에 재편성시켰다. 4월29일 량세봉은 참모장 김학규를 대표로 파견하여 당취오와 <중조 두 민족련합항일투쟁협의>를 체결하였다.

1932년9월 박대호 부대가 관전현 우모오를 포위공격하였다. 우모오는 환인현과 관전현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지세가 복잡하였다. 이곳은 괴뢰 압록강지구 사령관 서문해의 거점으로 8개 련의 약 1,000명이나 되는 괴뢰군과 일본군 나까이지로의 한개 중대가 주둔해있었다. 9월7일 새벽 우모오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자 박대호가 이끄는 조선혁명군 특무대가 기세당당하게 우모오로 진격하였다. 박대호는 돌격대를 인솔하여 우모로거리로 돌격하여 포화 속에서 적들과 육박전을 벌였고 적들의 시체는 여기저기에 너부러졌다. 서문해는 황급히 말을 타고 도주하였고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적들은 다시 괴뢰군 3개 련과 일군 2개 중대가 산포, 박격포, 경, 중 기관총 등 무기를 앞세우고 우모오로 증원해왔고 봉성 석두성에 주둔해있던 괴로군 600명도 증원부대로 파견됐다. 료녕민중자위군과 조선혁명군 특무대는 치렬한 격전 끝에 일본군과 괴뢰군의 겹겹한 포위를 뚫고 감천령방어지로 철퇴하였다. 조선혁명군 특무대는 료녕민중자위군과 신빈, 통화, 류하, 무순, 청원 등지에서 일본군과 용감히 싸우면서 허다한 전공을 올렸다.

1933년1월 신빈현 왕청문 남의수골에서 있은 조선혁명군 골간회의에서 량세봉이 총사령원을, 박대호가 부총사령원을 담임하기로 결정하였다. 4월 산성진에 주둔한 위만봉천성 경비사령부 사령관 우지산은 위만군 제1부를 인솔하여 일본군의 감독하게 료동일대의 항일무장을 ‘토벌’하기 시작하였다. 박대호는 량세봉 총사령의 명령에 따라 력량을 보존하면서 적들을 령활하게 타격하기 위해 대오를 료동지구에서 철퇴시키고 집안현 쌍분자, 문자구, 마의촌로령, 림강현 쌍산자 일대의 국경선에서 활동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적의 경찰소 등을 습격하였다. 당시 ‘대호’의 위엄은 ‘3강’류역에 널리 알려졌는데 적들은 ‘대호’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하여 어찌할바를 몰랐다.

1934년9월 왜놈들은 조선혁명군 총사령 량세봉과 박대호, 최윤구, 장명도 등 조선혁명군 수령을 잡으려고 갖은 음모를 꾸몄는데 당해 9월 19일 량세봉 총사령이 변절자에게 암살되였다. 조선혁명군은 김활석을 총사령으로 추대하였고 박대호는 부총사령으로, 조선혁명중앙위원회 위원, 혁명군정부 법무부장으로 되였다.

이 시기 박대호는 하로하의 마가자에 조선인학교를 꾸리고 주변 조선인청소년들이 글을 배우도록 하고 그들에게 애국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왜놈들은 반일무장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잔혹한 ‘3광’정책을 감행하였다. ‘동변도특별사업부’를 설치하고 간첩활동을 창궐하게 진행하였는데 조선혁명군간부들이 선후 체포되고 변절하게 되여 조선혁명군 내부의 정치와 군사, 경제상에서 극도로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항일을 끝까지 견지하려는 박대호, 최윤구는 60여명의 조선혁명군을 인솔하여 1937년 11월 환인현 요전수구밀영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군단과 련합하였다. 이로써 량세봉 총사령의 생전 념원을 실현하였다.

1938년 초 박대호는 장기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다보니 많은 질병으로 더는 전투를 직접 지휘할 수 없게 되자 부분 대원을 거느리고 집안, 통화, 무송 등지와 안도 이도백하의 심산밀림 속에서 생활하면서 독립군의 군자금을 마련하는 등 지하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러자 변절자의 밀고로 1943년 2월 무송현 산굴밀영에서 불행하게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무송현감옥에서 후에는 안도현 명월진 태평촌에 있는 반일분자 수용소로 이동되여 강제로동을 하였고 옥중에서 8월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잔혹한 형벌에 시달린 박대호는 1947년11월15일에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박대호의 동생 박영호 소대장

박대호의 맏형과 둘째형 등은 관전현 보달원 혼하 량안의 고량지에서 1년간 살다가 부얼강 량안의 환인현 상전자로 이사하였다. 박대호와 동생 박영호의 가정은 여전히 고령지에서 살고 있었다. 박대호가 혁명에 투신한 후 박영호는 집에서 두 집 살림을 맡아보면서 형의 반일독립운동을 도왔다. 농사를 짓는 한편 형에게 정보도 날라다 주었다.

1931년 2월, 박영호가 18세 나던 해였다. 일본 동변도로특별공작부 간첩이며 변절자인 정만기, 박수림, 전주일 등 놈들이 한밤중에 박영호집에 들이닥쳤다. 온 집식구들에게 형벌을 들이대면서 박대호의 활동거점을 대라고 을러메였지만 혹형 앞에서도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기가 죽은 놈들은 “오늘 너희들이 입을 열지 않지. 어디 두고 보자” 라고 으름장을 놓고는 둘아가버렸다.

불안한 예감이 든 박영호는 다급히 온 집식구들을 데리고 박대호형이 있는 심산밀영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박대호와 박영호의 가정은 독립군 제1로군 사령부로 오게 되였다. 박대호는 량세봉 등 책임자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고 동생 박영호를 호위대 소대장으로 배치하였다. 구체임무는 사령부 가족들의 생활을 안치하며 부대를 따라 전이하고 보안조치를 대는 등 후근일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박영호는 소대장직을 맡고 총가목을 쥐고 사령부 고위급 간부들의 가족을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박영호는 군관가족들을 거느리고 부대를 따라 다니면서 간고한 나날 속에서도 늘 가족들에게 애국주의와 반일투쟁사상을 고취하고 비밀을 고수하라고 교육하였다.

1934왜놈들이 남만에서 ‘치안숙정’ 명목으로 모조리 죽이고 불사르고 빼앗는 ‘3광’정책을 감행하였다. 1935년 월 박대호 부총사령은 부대를 거느리고 료녕민중자위군의 장경옥 부대와 련합하여 사첨자, 하로하에서 100명 왜군, 200여명 위만군과 쌍수동에서 치렬한 격전을 벌여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였다.

그 이튿날 저녁 박대호의 맏며느리가 임신막달이 되여 거동이 불편하자 잠시 지하실에 머물었다. 한밤중에 왜경 여럿이 통역을 데리고 자위군 호가의 안내하에 돌연습격하고 소추피구를 포위하였다. 이때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박영호 소대장과 그 가족들이 몽땅 생포되고 말았다. 왜경들은 그 전날 저녁 전투에서 패했던 화풀이로 가족을 다 죽이려 하였다. 그놈들은 먼저 박영호를 대나무에 묶어 매달았다. 박영호는 큰 소리로 “내가 부대가족을 거느리는 독립군간부다. 죽일테면 나를 죽여라. 아이와 녀자들은 죄가 없다. 너희들도 가족이 있지 않느냐? 무고한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웨쳤다.

왜경들은 박영호의 태도가 변함없는지라 박영호를 대고 총을 쏘아 죽이였다. 그리고 막달이 됨 임산부를 칼로 찔러 죽이고 그래도 성차지 않은지 박대호의 장자 박윤희, 둘째 박윤구를 끈으로 묶어 경찰서로 압송하여 하나는 공을 청하고 다른 하나는 심문하여 정보를 얻어내려 하였다. 부녀자들과 아이들까지 몽땅 죽이려 들자 왜경의 통역인 장모가 나서서 “군인들이 반일하는데는 죄가 많지만 아이와 녀자들이야 송아지와 같아 끄는대로 갈수밖에 없습죠. 그들이 뭘 안다고 죄가 있겠습니까? 자비를 베푸시죠” 라고 말하였다. 그 말에 왜경도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살인을 그만두었다. 박윤희 두 형제는 압송하던중 왜경들이 류탄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당하자 놈들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서 도망쳤다. 그들은 가족과 아이들을 혼강가에 있는 소추피에서부터 환인 북쪽에 있는 부얼강안 상전자에 사는 큰아버지네 집에 보내 피신시켰다. 이렇게 나머지 집식구는 토벌을 면하고 그 후손이 살아남게 되였다.

박대호의 동생 박영호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 민정부에서는 1983년 6월 26일 ‘혁명렬사증’을 새로 발급했는데 증서에는 혁명에 참가한 시간과 희생 기간 지점, 원인 등이 명기되여있었고 그를 “항련조선독립단 패장”으로 밝혔으며 이 렬사증 비준 기관과 시간을 ‘중앙인민정부’, ‘1963년 8월’로 적혀있었다.

박영호의 며느리 배재순(82)과 손주 박홍률(64)는 아직도 환인현 상전자촌에서 농사일을 하며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다.

부친의 생전 념원을 풀고저 20여년 동분서주

박홍민씨는 26년간 할아버지 박대호의 산소를 성묘하며 부친(박윤수, 박대호의 셋째아들)이 생전에 남긴 념원을 이룰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박홍민(왼쪽)이 전정혁 료동항렬연구실 주임과 함께 할아버지의 묘소를 성묘하고 있다.

무순 심무신성 리석채진에 살지만 해마다 청명과 추석날이면 꼭 환인에 있는 할아버지의 산소에 성묘한다는 박홍민씨는 가슴아픈 사연을 이렇게 전했다.

1992년 9월 당시 장인의 한국에 계시는 친척의 초청으로 박홍민씨는 안해와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그는 부친이 한국에 가면 꼭 친척을 찾아보라는 유언을 잊지 않고 12월의 어느날 할아버지의 고향인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현재는 읍) 고평동을 찾았다. 생전에 부친한테 증조부가 이 곳의 면장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어슴푸레 들은적 있었다.

면장에게 증조부가 밀양 박씨이고 이 곳의 면장을 하였다는 이야기를 전하니 그 면장은 잠간 기다리라며 전화를 걸더니 박씨 친척을 찾았다며 차를 고평동 마을까지 보내주었다. 마을 어구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나를 자기 집으로 안내했다. 집에는 로인이 있었는데 그 로인은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만 먼 친척이 된다며 어딘가 전화를 걸었다. 저녁 6가 되자 대구에서 사람이 왔는데 알고보니 그는 나의 8촌형 되는 박덕환씨였다. 우리는 너무 반가와서 부둥켜안고 한참 울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헌데 그의 손에는 웬 편지가 쥐여있었다. 알고보니 부친이 82년경에 한국 박씨 문중에 보낸 서신이였다. 그때서야 나도 처음으로 부친이 조부의 향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음을 알게 되였다. 당시 부친은 할아버지의 족보에 대한 일을 알고 싶어서 고향에 서신을 보낸 것이였다. 이 서신은 당시 교사출신인 박덕환에게 전해졌고 박덕환은 아직 중한수교가 이뤄지지 않은 때여서 매우 조심스레 처사하여 이 서신을 현지 경찰소에 등록시켰다 한다.

나는 형한테 하나는 친척을 찾고 다른 하나는 조부의 사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며 부친한테 들은 조부의 독립투쟁 경과를 들려주었다. 형은 조부는 우리 박씨 가문의 영웅이라며 독립유공자를 신청해보자고 했다.

이튿날 나는 형과 함께 면사무소를 찾아가 조부의 호적을 찾았다. 큰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의 호적은 있었지만 박대호 조부의 호적은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사무소 직원은 사무소에 화재나 수재가 없었기에 웬간하면 있을 것이라며 누군가(일본인) 고의로 훼멸시킨 것이라고 했다.

나는 형과 함께 대구와 한국 여러 곳의 도서관을 다니며 조부에 관한 력사자료를 수집했고 1993년 2월에 조부의 독립유공자 자료를 신청했다. 당시 신청만 하면 쉽게 내려올줄 알았는데 3월 1일 독립기념일에 많은 유공자 명단이 내려왔지만 박대호의 이름은 없었다. 내가 상심한 나머지 형한테 전화를 걸어 무슨 원인인가고 묻자 자기도 잘 모른다고 하였다. 나는 3년 비자 기간이 지나 불법체류자로 된 채 귀국 길에 올랐다.

중국에 와서도 형과 계속 련락하였고 수차 신청자료를 제출했지만 번마다 ‘탈락’되였다. 어느 하루 형은 보훈처에서 내가 계속 신청하니 무슨 브로커로 생각한다며 직접 나더러 신청하라고 하였다. 그때로부터 나는 직접 보훈처 관계자와 련락을 가졌다.

2013년의 어느날 보훈처 담당자가 나한테 할아버지가 투옥된 당시의 재판서와 석방하게 된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하였다. 나는 한가닥의 희망을 안고 장춘에 있는 길림성서류국과 연길시 서류국, 공안국 서류실, 안도현 서류국, 명월진서류국, 안도현공안국 서류실을 수십번 좇아다니며 관련 서류를 찾았지만 헛물을 켜고 말았다.

그런데 올해 음력설 기간 보훈처에서 전화가 걸려와 앞서 요구하던 자료는 필요 없고 우리가 할아버지와 가족관계임을 증명하는 자료를 제출하면 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부친이 생전에 살았던 환인, 휘남, 집안, 송원시 관계부문에 가서 부친과 할아버지의 가족관계를 증명하려 했지만 역시 불가능한 일이였다. 당시 한낱 중국 농민이였던 부친한테 1947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관련되는 무슨 서류가 있었을가?

“당시 할아버지가 일경에게 동굴에서 체포되였을 때 둘째 큰아버지와 여러명의 대원이 있었대요. 둘째 큰아버지는 감옥에서 갖은 고문에 시달려 정신병에 걸렸는데 먼저 출옥했고 할아버지는 8.15 광복을 맞아 출옥하여 안도현 명월진의 경상촌이라는 곳에서 신발 수리로 생계를 유지하다가 1947년 11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지요. 그러다 해방되서 얼마 안되여 명월진에 있는 할아버지의 친구로부터 상전자에 살고 있는 부친한테 할아버지의 묘를 옮겨가라는 전갈이 와서 부친은 경상촌으로 갔어요. 뭐 저수지를 만든다고, 묘지를 파서보니 시체가 채 썩지 않았는데 부친은 그 유해를 물에 여러번 씻은 다음 보자기로 잘 싸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대요. 검사가 어찌나 심했던지 통화에서 기차를 내려서야 한시름을 놓았대요.”

박홍민씨는 그때 정경을 돌이키며 눈시울을 붉히였다.

그는 자기가 어릴적에 무순 리석채진으로 이사했고 부친을 따라 자주 둘째 큰아버지가 사는 상전자에 가서 놀았는데 그때마다 동네 어른들은 우리 부자를 반갑게 맞아주었고 할아버지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하였다고 했다. 그가 19살 성인이 되여서도 로인들은 그를 반겨주며 할아버지와 독립군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1995년 뒤에는 할아버지와 독립군의 애기를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조선족 집도 몇집 안되였다. 그러다보니 부친과 할아버지의 가족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고인이 된 셈이다.

“저희 할아버지는 조선독립을 위해서 청춘과 고귀한 생명을 바쳤어요. 할아버지의 사적을 잘 발굴하여 할아버지의 독립투쟁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민족의 후대들이 민족의 력사를 바로알도록 하는 것이 저한테 짊어진 무거운 짐입니다.”

이미 쉰 고개를 넘은 박홍민씨는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는 길이 평탄하지 않지만 이미 힘겨운 나날과 과정을 거쳐왔다며 부친의 생전 념원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뛸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부친과 할아버지의 가족관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현재로서는 부친이 생전에 한국의 박씨 가문에 보낸 서신이라며 그 서신이 한국 경찰서에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1982년 경에 박홍민의 부친이 한국 박씨 가문에 보낸 편지 봉투.



전정혁, 오지훈 기자  
료녕신문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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