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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죽의 초심
기사 입력 2018-12-27 19:19:05  

동지는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겠건만 엄마의 팥죽은 영원히 기억으로만 남았다. 해마다 동지가 되면 엄마는 어떻게 기억을 하는지 어김없이 팥죽을 끓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만들었다. 옛날 한구들 식구들이 한술씩 뜨고나면 별로 남지 않았던 기억에서 그르셨는지도 모르겠다.

그해 동지에도 엄마는 어김없이 마트에서 필요한 식자재들을 사다가 팥죽을 만들었다. 그런데 뭐가 모자랐던지 다시 마트에 다녀온다는게 그만 팥죽을 끓이던 가스불을 켜놓은채로 밖에 나갔다. 결국 팥죽은 다 탔고 집안은 연기로 가득했다.

“먹지도 않는걸 하지 말라는데 왜 계속 합니까?”
“글쎄 말이다. 이제는 정말 안 하겠다. 나는 니가 먹겠는가 해서...”

나는 저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고 엄마는 나지막한 소리로 혼자 되뇌인다. 그 뒤로 엄마는 팥죽을 안 만드셨다. 매번 이맘 때면 팥죽을 해야만 하는줄로 알고 살아왔던 엄마에게 있어서는 팥죽 할 일이 없는 동지날은 종일 뭔가 모자라는 것 같이 허전했을 것이다.

시골에 시집와 가난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해왔던 엄마에게 팥죽이란 그야말로 명절음식이였다. 그래서 먹거리가 풍성한 현실에도 팥죽은 의연히 특별한 음식으로 아들한테 꼭 해먹이고 싶었던 특식이다. 팥죽이 별로 특별한 맛은 없지만 그렇다고 먹지 못할 정도로 거부할 음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성들여 만든 팥죽에 숱가락 한번 안 갔다는건 엄마 성의에 대한 무참한 거부였다.

지금에 와서 40∼50대 주부들 보고 팥죽을 해먹자고 하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혀를 내두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전통은 이른바 현대 문명이라는 포장하에 하나하나 묻혀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학교 때 학부 선생님들은 우리가 멀리 고향을 떠나와서 집밥을 먹을 기회가 없다고 종종 집에 불러서 여러가지 음식들을 만들어 먹였다. 그런데 음식은 이를데 없이 맛있는 와중에 밥상 례절에 어긋날가 조심조심 먹었던 선생님댁이 있었다. 밥먹을 때 국사발과 밥공기의 위치며 저가락과 숟가락의 사용으로부터 시작해서 식사중에 어른들 앞에서 지켜야 례의를 하나하나 지적해주셨다. 숟가락이 있는데 저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안되고 밥그릇을 손에 들고 먹어도 안되며 어른이 수저를 놓으신 다음에 밥상을 떠야 한다는 여러가지 례절을 가르쳐 주셨다. 밥먹을 때 조심스럽고 다소 불편하기는 했어도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전통 식문화를 알고 지켜가는 소중한 교육의 생생한 현장이였다.

지금은 이런 전통 식문화가 얼마 남아있는 것 같지 않다. 간혹 회식을 하면 선후배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밑반찬이 밥상에 오르기 바쁘게 날렵하게 저가락을 놀리는 후배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안쓰러운건 천천히 먹어도 누가 빼앗아갈 사람이 없건만 한개 요리에서 저가락이 실북나들듯이 수차를 왕복하며 입에 가져다 넣는 모습이다. 그걸 한참 지켜보면서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들더라. 아마 학교 때 기숙사 생활을 하며 교내 식당에서 먹던 버릇이 그대로 회식자리에까지 옯겨진 것 같다.

지금은 옛 전통을 다시 살려 음식을 랑비하는 것을 많이 반대하는 분위기로 돌아왔지만 불과 5년전만 해도 음식을 모자라다 하게 시키면 그것은 손님 초대에서 결레고 쪼잔한 표현으로 비춰졌다. 그런데 지금도 쌀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내돈 내고 내가 시킨건데 먹다가 남으면 버릴수도 있는거지. 그렇다고 여러가지가 먹고 싶은데 한가지만 시켜? 론리상 틀린 말은 아니다. 보리고개가 있는 시절도 아니고 시대가 어느때라고. 그리고 남기는게 두렵다고 먹고 싶은걸 못먹어? 역시 딱히 반박할만한 근거도 없다. 그런데 오늘 못먹어본 음식은 래일도 있고 모레도 있는데 차근차근 먹어가면 안되는걸가? 그걸 꼭 한꺼번에 다 시켜서 맛을 봐야하고 나중에 남기더라도 내 돈으로 샀으니 내 마음대로 버리겠다는건 좀 응석인 것 같다.

나는 한국인들이 돌솥 찌개나 국을 시켰을 때 거의 다 먹을 무렵에 그릇 밑에다 뭔가를 받쳐놓고 그릇이 기울게 한 다음 나머지 한 숟가락까지 다 비우는걸 보면 참 본받을 바라고 생각한다. 처음 서울에 갔을 때 국밥을 시켜주는걸 그냥 밥공기만 다 비우고 국사발은 국물만 몇숟가락 뜨다가 다 남겼던 기억이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다. 그 자리의 한국인들은 그냥 “많이 남기셨네요.” 정도로 혼자말처럼 할뿐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후에 생각해보니 내가 큰 결례를 한거다. 춘향전에서 벌써 “금준미주는 천인혈이요, 옥반가효는 만성고”라며 쌀이 무서운줄 알라고 경고했었건만.

전통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현대 문명은 있을수 없다. 훌륭한 전통은 현대문명의 깊숙한 곳에 튼튼한 기반으로 자리매김해 항상 고층문명이 여러가지 풍파에도 전복되지 않고 여러가지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도록 튼튼하게 받쳐준다.

인간은 잘 살수록 욕망이 더 커지게 되여 있는것 같다. 한 촌의 지부서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옛날에 못살 때는 마을 사람들이 아무런 불만이 없이 화목하게 잘 살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정책이 좋아져 수입을 올려주니 되려 이런 저런 불만들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빈곤가구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한다며 내가 왜 빈곤가구냐고 따졌던 사람들이 요즘 빈곤해탈 정책으로 보조금이 지급되니 왜 저 집만 빈곤가구고 우리는 아니냐고 따진다. 나도 저집 못지 않게 어렵다며 다투어 빈곤가구가 되겠다고 나선다.

사촌이 기와집을 져도 배가 아프다. 나와 사촌이 다 똑같은 초가집에서 살 때는 괜찮았는데, 그리고 사촌이 기와집을 졌다해서 내가 지금 살고있는 집이 옛날보다 못해 진것도 아닌데 괜히 까닭없이 심기가 불편하다. 옛날에는 떡 하나를 만들어도 이웃끼리 나눠먹으며 대대손손 화기애애하고 화목하게 잘 살아왔건만 이제 그 순박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전통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초심을 잃지 말자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개구리를 비하하는건 아니지만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못하는건 개구리 지력 문제라서 그렇다 치더라도 지력상수가 개구리보다 높은 사람은 개구리를 거울 삼아서라도 초심을 잃지 말고 살아야 되지 않을가 싶다.

팥죽은 엄마가 할머니로부터 이어 받아 그대로 맛을 보존해왔다. 그 덕분에 나는 동지라는 절기에는 팥죽을 해먹는다는 민족의 소중한 민속습관을 눈으로, 맛으로 익히 기억하게 되였다.

해마다 동지가 오면 팥죽을 해먹이고 싶은 엄마의 자식 사랑은 초지일관 색바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낳은 정 키운 정에 대한 고마움을 항상 잊지 말고 자식된 도리를 다해가는게 인간 본연의 초심이라는 생각을 올해에도 동지를 앞두고 하게 된다.

나에게는 민속사전의 동지팥죽보다는 엄마의 오그랑죽이 훨씬 더 친숙하다.


흑룡강신문 2018-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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