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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랄리아적 한국인의 연변, 그리고 조선족 사랑
기사 입력 2017-03-29 19:50:16  

최성원교수(왼쪽)와  연변려명농민대학 전임 교장 김철훈.

-17년간 연변려명농민대학에 심혈을 몰부은 최성원교수의 이야기

2011년2월에 연변려명농민대학이 아쉽게 페교된지도 어언 6년 됐다. 려명농민대학이 걸어온 50여 성상에는 곡절도 많고 사연도 많다. 그중에서 가장 잊을수 없는 일은 오스트랄리아 국적의 한국인 최성원교수(현재 89세)가 려명농민대학의 발전을 위해 기울인 심혈이다.

“남을 돕는다”는 말은 하기는 쉬우나 행동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자기 자식도 아닌 중국조선족들을 위해 타국에서 고생을 사서 한 최성원교수이다.


연변려명농민대학의 은인

1992년11월초 64세의 최성원교수는 갈라진지 42년 되는 조선황해도 송화(지금의 과일군)에 있는 막내동생 최태식을 만나보고 평양에서 국제렬차로 중국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서 우연하게 연변에서 사는 조선족을 만났고 그를 통해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있으며 조선족들은 민족자치 정책의 따사로움을 받으며 오손도손 화목하게 살아간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한국과 조선을 제외한 중국땅에 조선인들이 많이 산다니...”뜻밖의 소식에 신비하고 궁금증이 생겨 최교수는 연변땅을 한번 다녀보고싶은 마음으로 연변행차에 몸을 실었다.

연길에 도착한 최교수는 청년호텔에 주숙하였다. 분명 조선어로 쓴 청년호텔을 보았고 조선말을 하는 호텔 복무원들을 보았다. 첫 인상부터 최교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날밤 이궁리저궁리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평생 염소, 젖소, 사슴 양식으로 살아온지라 관련 부문을 찾는것이 바람직한데...” 이른새벽 최교수는 청년호텔 남쪽에 있는 강뚝을 따라 산보하다가 조선족로인을 만났다. 그가 연변조선족자치주 통전부에 있는 리장섭주임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최교수는 그날로 리장섭주임의 소개로 려명농민대학 김철훈교장을 만났다.

김철훈교장은 “려명농민대학의 전신은 연길현새벽농민대학이고 일찍 1958년에 연변의 첫 초급농업사 책임자 김시룡이 설립한 우리 나라 첫 농민대학입니다. 건교초기에는 교사가 없어 밖에서 벽돌장, 돌멩이, 나무토막을 깔고 앉아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후 국가와 지방정부의 지원하에 4층교사를 짓고 농학, 축목, 특산 등 학과를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인재를 양성했습니다.”고 소개하였다.

“우리 조선민족이 중국의 첫 농민대학을 꾸렸다. 중국인민의 위대한 령수 모주석께서 칭찬하시고...”최교수는 들을수록 감격에 겨워 마음이 설레였다.

“그런데 개혁개방이후 학교꾸리기가 매우 힘들게 되였습니다. 경제발전과 농촌 생산경영체제개혁의 변화, 알곡을 비롯한 농부산물가격 폭락으로 농업기술 인재를 양성하는 우리 농업대학 학생원천이 크게 줄어들어 지금 전교적으로 3개 학과40명 학생이 되나마나 합니다. 이대로 나간다면 학교가 문을 닫게 됩니다!” 김교장은 매우 안타까와 했다.

“학교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 학과 개혁을 하는것인데 영어, 컴퓨터 등 학과를 설치하자니 자금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되는 자금이 수요됩니까? ”최교수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김철훈교장은 “먼저 영어학과를 꾸리겠는데 1만딸라라도 해결해 주시면 잘 꾸려보겠습니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최교수는 꼭 명년봄전으로 해결해 보겠다고 대답했다.

오스트랄리아로 귀국한 최교수는 한국, 미국, 오스트랄리아 등 나라에 있는 친구들한데 수백통의 전화와 편지를 날리면서 지원의 손길을 바랐다.

드디어 이듬해 3월 최교수는 한국에 있는 실력이 막강한 한경수박사를 모시고 왔다.

“려명농민대학을 구하기 위해 최교수는 집일을 제쳐놓고 자기를 손꼽아 기다릴 김교장님을 생각하며 매일 분주히 보냈다.”고 한경수박사는 말했다.

려명대학을 돌아본 한경수박사는 “어지간하면 도와주려는데 한강에 물붓기 구만. 손을 못 대겠군”하고 떠날 때 최교수한테 학교운영에 다소나마 보태쓰라고 만딸라를 주고 가버렸다. “그래도 다행이였다. 한푼도 안주고 가면 어찌 하랴 하였는데...”최교수가 한박사에게서 받은 만딸라를 김교장 손에 쥐여주자 김교장은 생각밖이라 싱글벙글 좋아했다.

김교장은 그 돈으로 연변에서 영어학과를 꾸리기에 가장 좋은 설비를 갖추고 학생모집과 더불어 최교수의 소개로 한국으로부터 무보수 영어교원을 초방할수 있었다.

최교수가 이 소식을 한경수박사한테 전했더니 한경수박사는 믿기 어렵다며 직접 학교를 찾았다. “정말 놀라운 일이지,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라네”하면서 김교장을 칭찬했다. 그 자리에서 김교장이 제기한 컴퓨터학과 설치도 쾌히 승낙하고 당장에서 만딸라를 주는 외에도 한국에 전화하여 3만3000 딸라를 부치라 했다.

이렇게 최교수의 련계로 서울 염광학원원장 김정렬교수가 보낸 만딸라를 합쳐 90대 컴퓨터를 사고 3개 반을 모집하였다

그후로 려명농민대학과 김철훈교장의 이름이 해외까지 알려지게 되였으며 자금 지원도 잇따랐다.

그리고 농촌어린이들의 조기교육을 위한 유사반과 실습유치원, 유치원생 통근전용차, 학교 교직원들의 전용뻐스 등 여러가지를 갖추었다. 심지어 미국에서 보내온 지원의 손길로 학교용 승용차 한대까지 마련하게 되였다.

10여년래 려명농민대학에서는 인민페3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모두 최성원교수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것이 없다.


“곤난한 분들을 돕는것이 저의 락입니다”

생활곤난을 받는 전교 학생 반수의 장학금도 모두 최교수의 소개로 해결되였다. 학교는 최성원교수의 업적을 기리여 그를 명예교장으로 초빙하였다.

염소 두마리로 7, 8명 식구의 생계를 유지하고저 한국 제주도에서 밤낮 손발이 닳도록 일해온 최성원교수이고 큰 목장 주인이 되기 위해 갖은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 오스트랄리아에 간 그다. 오스트랄리아에서 최교수는 목장주인의 꿈을 이루게 되였다.

고생을 밥먹듯이 한 최교수는 곤난한 사람을 보기만 하면 지나쳐 버리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한번은 대련 민박집에서 37세 나는 김명학이라는 연변 개산툰의 젊은이를 알게 되였는데 김씨는 청도에서 한국인이 꾸리는 악세사리회사에 다녔다.

힘들게 일 하고도 낮은 로임을 받는다면서 “자금이 좀 만 있어도 악세사리 공장을 꾸리겠는데...”고 탄식했다. 최교수가 “자금이 얼마면 될수 있겠는가?”고 묻자 김씨는 인민페 만원만 있으면 된다고 하였다.

최교수가 “기술은 자체로 할수 있게 끔 배웠는가?”고 하자 “대체상 다 배웠습니다. 회사 일도 사실은 저의가 다하는 셈입니다.”고 했다.

최교수는 젊은이의 사람됨됨이가 괜찮아 보이니 “오스트랄리아에 돌아가 인차 만원을 해결해 줄테니 기술을 더 잘 배우라”고 당부하고 청도주소를 적었다.

그후 최교수는 부인 백경애녀사를 청도에 보내 김씨 젊은이한테 만원을 주고 돌아갔다.

1994년 여름 한경수박사와 장백산유람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이도백하에 도착하기전에 도로에 한 젊은이가 누워 있었다. 그 옆에는 한 처녀가 맨발바람으로 “빨리 살려주세요!”하며 손을 비비며 애원하였다. 처녀애는 매우 허기가 들어 기진맥진해 보이더니 그만 땅에 쓰러졌다. 우리 일행은 불시에 닥친일이라 어리둥절해 하면서 혹시 시끄러운 일이라도 생길가바 그만 가자고 했다.

이때 최교수는 “그럼 못 쓴다”고 하면서 운전수더러 뒤자리에 앉히라 했다.

알고 보니 이 한쌍의 젊은이는 길림석창이라는 곳에 있는데 약혼한 사이이고 약혼녀가 돈벌려고 장백산개발건설장에서 수개월동안 밥 지어주었다 한다.

그런데 한달 로임도 주지 않아 남자가 와서 가만히 약혼녀를 빼돌리고 도망가는 중이였다.
저녁식사때 최교수와 사모님은 그 낯모를 한족 젊은이들을 자기 옆에 앉히고 배불리 음식을 먹였다. 그리고 안도역까지 데려다 주고 돈 200원을 주어보냈다.

어느 한번 학교 윤기사네 누님 아들이 두발 모두 심한 화상을 입었다는 말을 듣고 최교수는 돈 250원을 운전기사한데 주면서 치료비에 보태라고 했다.

1995년 최교수는 유사반 차향화학생의 맹장수술비를 감당한 외에도 암에 걸린 어머니의 치료에 보태쓰라고 1000딸라를 내놨다.

최교수한테는 3남1녀가 있다. 그는 자식들한테도 “지금 중국조선족들이 잠시 곤난에 처해 있는데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는가”고 하면서 성의껏 지원하라고 부탁했다.

그리하여 최교수와 그 자식들이 연변려명농민대학 학생외에도 룡정시 동성소학교, 동성중학교, 왕청배초구중학교, 왕청중학교, 룡정중학교, 룡정2중, 룡정5중 등에 다니는 빈곤학생들과 연변대학, 북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준 장학금이 10여만원에 달한다.

특히 동성소학교 8명 학생들에게 준 장학금은 최교수가 8명 손자들을 동원하여 학생 한명씩 책임지고 도와주게 한것이다.

최교수는 또 한국, 미국에 있는 유명인사들을 동원하여 “해외동포 원호위원회” 를 통해 조선 함경북도 함흥에 아세아주에서 가장 큰 청년목장을 꾸리고 이미 3000여마리의 염소를 보냈다 한다.

남을 돕기 위해 최교수 부부는 배를 탈수 있으면 비행기를 타지 않았고 호텔 대신 민박에 들고 양말도 기워 신으면서 돈을 아겼다.


“연변은 저의 세번째 고향입니다”

최성원교수는 1993년 3월에 한경수박사를 모시고 려명농민대학으로 온후로 거의 학교에 있으면서 사무를 봤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지내는 그를 보고 자식들이 보고 싶으시겠는데 고향으로 돌아가시라 하면 “연변은 나의 세번째 고향입니다. 학교에서 쫓지만 않으면 나는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고싶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는 죽는 날까지 려명농민대학을 돕겠습니다.”고 했다.

최교수는 사모님은 물론 어머니까지 연변에 모셔왔고 그의 어머니는 려명농민대학에서 세상을 떠나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최교수가 려명농민대학에 온지도 17년 세월이 흘렀다. 2009년부터 학생원천이 끊기면서 최교수는 2010년말에 정든 세번째 고향 연변을 떠나 오스트랄리아로 돌아갔다.

최성원교수의 연변려명농민대학에 대한 사랑, 그리고  조선족들에게 쏟아부은 사랑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을것이다.


김삼철
길림신문 2017-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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