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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배달민족    조회 8,200    2008.10.10배달민족님의 다른 글      
"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라는 제목의 논설문을 올립니다.
이 논설문은 송 영상(자유기고가) 님이 한글 전용과 한자 혼용의 기존의 주장들을 모두 비교 정리하여, 한자 혼용의 폐해와 한글 전용의 필요성을 논리 정연하게 주장한 글입니다.
이 글을 쓴 송 영상 님은 지난해(2000년) 한글학회로부터 '국어 운동 공로 표창패'를 받은 바 있으며, 지금은 인터넷 한글 운동 관련 누리집을 다니며 우리 말글 전도사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한글 전용 주장의 본보기로 추천합니다. 만일 부족하다면 한글학회를 방문하셔서 이에 관련된 풍부한 자료들을 열람하시기 바랍니다.

한글학회 출판/연구부(02-738-2237)




한자를 쓰는 것이 왜 문제인가
송 영상 (1999. 2)

Ⅰ. 머릿말

글자란 무엇인가. (점자 같은 특수한 문자를 제외한) 일반적인 의미의 글자를 <동아 새국어사전>은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라고 뜻매김하고 있다. 그렇다. 글자란 말을 적는 일정한 부호이다. 말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글자가 있다. 그럼 말이란 무엇인가. 말이란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는 소리, 또는 그 행위나 내용’이라고 뜻매김할 수 있는데, 좁은 뜻으론 ‘뜻과 소리의 짜임’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소리(음운론), 뜻(의미론), 짜임(말본)’이 말의 세 요소다. 따라서 글자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말의 세 요소(소리+뜻+짜임)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라는 ‘시각성’이 덧붙는다.
입말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제약이 있다. 그래서 이러한 제약을 극복하게 위해 글자라는 것이 고안되었다. 글자를 사용하면 그 말을 그 자리에서 직접 듣지 않았더라도 글자를 통해 다른 곳에서도(공간적 제약 극복)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다음에도(시간적 제약 극복) 그 글자를 통해 그 말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글자는 입말의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극복시켜 주는 것일 뿐, 그 입말의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글자인 한자를 쓸 것인가 하는 문제도 미래의 우리말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먼저 정하고 그 다음 그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다.
물론 글자는 말을 전달하는 도구로서만 기능 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글자라는 것이 말을 보조?보완하는 도구로서 고안된 것이지만 일단 글자가 생긴 다음에는 글자 때문에 말 자체가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또 앞으로 특히 강조할 말의 청각성(청각적 변별력 ; 말소리를 귀로 듣고 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는 힘 또는 성질)이라는 것도 글자의 시각성에 따라 적잖게 영향을 받는다. 글자의 시각성 때문에 우리는 말의 청각성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글자가 오히려 말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현상이다. 글자는 본래 말이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고안된 보조적?보완적 도구라는 대원칙을 벗어나면 안 된다. 이 원칙을 벗어나 말과 글자의 주종 관계가 뒤바뀌면, 글자가 자칫 말의 본질을 훼손하게 되어 말이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글자 정책에서 항상 유념해야 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다.

Ⅱ. 말의 기본은 귀로 듣고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
1. 청각성이 말에서 중요한 까닭
우선 말은 ‘귀로 들어서’ 그 뜻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말은 듣기만 해서는 뜻을 알 수 없고 그 글자를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면, 엄청난 불편을 가져오기 때문에 말로서 제 구실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나라 말이나 다 이러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 세계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글을 모르지만 서로 자기 나라 말로 의사소통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중국은 지금도 까막눈이(문맹자)가 적지 않지만, 옛날에는 극소수 상위층 외에는 거의 모두가 까막눈이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 의사 소통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중국은 입말과 글말이 일치하지 않아, 글을 그대로 읽어 주면 그것을 바로 듣고 그 뜻을 다 알아듣는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입말은 글과는 관계없이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말이므로 이 입말을 사용해 의사소통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도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입말과 글말을 일치시키기 위해, 문체를 과거의 문언문에서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꿨다. 따라서 지금은 중국에서도 문장을 그대로 읽으면 그것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아낼 수 있다. 입말과 글말은 거의 일치하는 수준으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일상 생활용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문용어도 전문가 사이에서는 글을 보지 않고 그 말소리만 들어도 그 뜻을 아는 것이다. 들어서 아는 말과 들어서는 모르고 글자를 보아야 아는 말이 따로 있는 듯이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만약 그런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언어생활을 하는 나라가 아니다. 말이란 들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이미 말의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말도 들어서 그 뜻을 알아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자를 쓰자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소리로 듣는 것만 가지고는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도 남겨 두자는 것이 된다. 한자를 쓴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소리와 뜻의 분리를 가져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까닭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2. 말의 청각성과 글자의 관계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말은 본질적으로 청각성(청각적 변별성)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귀로 듣고’ 그 뜻을 알아낼 수 없는 말은 말의 구실을 할 수 없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이 점을 쉽게 보아 넘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리고 말은 청각성을 전제하고 있고 글자는 말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결국 글자는 기본적으로 청각성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가 나온다. 그런 면에서 소리글자는 뜻글자와 비교할 때 첫 단추를 제대로 낀(제대로 된 길에 들어선) 글자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글자는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나타낸 기호이기 때문에 시각성을 아울러 가질 것이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리고 글자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나타내야 하므로 본질적으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글자는 본질적으로 청각성, 시각성, 의미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관계는 묘한 면이 있다. 말이든 글자이든 그 궁극의 목적은 의미의 전달에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미성은 아주 본질적인 것으로 나머지 청각성이나 시각성도 이 의미성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돼 있다. 즉 청각성과 의미성, 시각성과 의미성은 각각 본질적으로 결합하고 있어서 나눌 수가 없다. 그러면 청각성과 시각성은 어떨까. 여기서 소리글자와 뜻글자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즉 소리글자는 청각성과 시각성도 완전히 한 몸이 되어 결합되어 있으나 뜻글자는 그런 관계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먼저 소리글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 나라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말로 옮기고 또 글자로도 옮긴다고 할 때에, 말하는 이는 “아름답다”고 발음하고(청각성), <아름답다>고 쓰며(시각성), 그 말을 듣는 이는 “아름답다”라고 듣고 (그 글자를 보는 이는 <아름답다>고 보고) ‘아름답다’란 뜻이라고 알아듣는다(의미성). 다시 말해 말이 지닌 의미의 전달은 말의 경우엔 청각성과 붙어 있고, 글자의 경우에는 시각성과 결합돼 있다. ‘아름답다’는 소리(청각성)=‘아름답다’는 의미(의미성), ‘아름답다’는 글꼴(시각성)=‘아름답다’는 의미(의미성)의 도식이 성립함과 동시에 또한 ‘아름답다’는 말소리(청각성)=‘아름답다’는 글꼴(시각성)의 등식까지도 성립하는 것이다. 즉 청각성=시각성=의미성이라는 등식이 성립하여 세 요소가 분리되질 않고 한 덩어리가 된다.
그러나 한자 같은 뜻글자의 경우는 다르다. 앞의 경우와 같이 ‘우리 나라 사람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그것을 말로 옮기고 또 글자로도 옮긴다고 할 때를 예로 들어보자. 말하는 이는 “미”라고 발음하고(청각성), <美>라고 쓰며(시각성), 듣는 이는 “미”라고 듣고(청각성)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알아듣고, 보는 이는 <美>라고 보고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알아듣는다(의미성). 그런데 이것은 우리 나라처럼 한자를 수입해서 쓰는 나라만의 특수한 상황인 면도 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처럼 이렇게 큰 시각성과 청각성의 괴리는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중국에서는 ‘메이(美)’라고 생각하고 ‘메이’라고 발음하며 <美>라고 쓰며, 듣는 이도 ‘메이’라고 듣고, 보는 이도 <美>라고 보고 ‘메이’=<美>라고 알아듣는 것이다. 다만 뜻글자는 본질적으로 청각성에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뜻글자는 소리를 고정시키는 힘이 약하기 때문이다. 한자를 읽는 방법은 나라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그런데 청각적 변별력과 관련해 뜻글자는 근본적인 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청각적 변별력을 가지는 말은 시각적 변별력의 도움이 필요 없으므로 굳이 시각성이 뛰어날 필요가 없으니 소리글자로도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청각적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낱말은 이미 말로서 갖춰야 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결여한 것이어서 말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글자란 원칙적으로 소리글자로 충분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칙적으로 뜻글자는 소리글자가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쓰게 된, 비정상적인 글자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세계 문자의 역사 또한 이러한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수천 년 동안 중국에서 뜻글자인 한자를 쓰게 된 것은 처음 문자생활을 시작할 당시 중국이 소리글자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첫 단추를 잘못 끼게 된 데서 비롯한 비극이었다. 처음에 한자는 뜻글자이면서도 청각적 변별력을 갖춘 글자로서 당시의 중국말을 제대로 담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글자생활이 널리 행해진 것이 아닌 데다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는 물론이고 종이가 발명된 후에도 글자를 적을 재료(종이)가 풍부하지 못하여, 될 수 있으면 글자 수를 줄여 글을 적다 보니 입말과 글말이 분리되게 되었다(문어체와 구어체의 괴리. 문어체와 구어체의 괴리는 20세기에 백화문을 정식 문체로서 규정하기 전까지 계속되게 된다.). 입말과 글말이 다르다는 것은 글자로 쓴 문장을 있는 그대로 입으로 읽었을 때는 청각적 변별력(말의 청각성)을 확보한다는 보장이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어느 때부터인가 한자문장은 중국의 입말과 괴리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자의 수가 늘어나면서 글자들 사이에 동음이의어가 양산될 수밖에 없어서(한자의 대부분은 형성자인데, 형성자는 음을 결정하는 부분과 뜻을 결정하는 부분이 결합된 것이므로, 형성자가 늘어날수록 음이 같은 글자가 늘어갈 수밖에 없다)청각성을 상실하는 한자가 늘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동음이의어의 증가와 글말(한자문)과 입말(일상생활에서 소리로 나누는 말)의 괴리라는 복합요인으로 인해 문자의 청각성이 일상생활의 대화 속에서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자(청각성은 입말로 실제로 쓸 때 그 의미가 있는 것인데 입말과 글자가 별 상관없이 분리돼 서로 따로따로 쓰이다 보니 문서에 쓰인 글이나 어휘들은 청각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청각성을 상실한 글자나 단어가 늘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이것 때문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 입말에서는 모두 청각적 변별력을 갖춘 말들만 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백화문이라고 불리는 구어체는 일상생활에서 실제 사용돼 오던 것이기 때문에 청각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일상대화로 쓰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한자가 우리 나라 같이 전혀 다른 입말을 쓰는 나라에 수입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 나라는 중국에서 청각성을 갖춘 중국 입말에 쓰이는 단어를 수입한 것이 아니라, 한자로 써 놓은 문서에 쓰인 글말을 수입해 단어를 구성하게 된 것이 문제였다. 중국에서 수입한 문서들은 바로 문언문으로 쓰여 있어서 이미 중국에서조차 청각성을 상실한 어휘들이었다. 그런데다가 중국말에는 사성(1성, 2성, 3성, 4성)[북경말 기준]이라는 것이 있어서 청각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지만, 우리 나라는 아무래도 중국 사람들같이 철저히 사성을 지킨다는 것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 들어온 한자의 발음수가 481 개에 불과한데[내가 직접 옥편(8,000 자 수록)을 보고 세어 본 숫자이다. 아마 2,000 자 안팎의 상용한자를 기준으로만 하면 발음 수는 여기에도 미치지 못할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괵 긱 녈 눈 뉵 닐 둑 볼 솨 솰 쉬 올 줄 퍅 퓨 헤 홰 훌 훙’ 같은 소리는 거의 쓰이지 않는 발음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런 소리를 빼면 실제 쓰이는 한자음은 450-460 개 정도가 정확한 숫자일 것이다. 게다가 ‘머리소리 법칙’(두음법칙)이 있기 때문에 첫음절에 오는 한자음은 더욱 제한적이다.] 이것은 오늘날 북경어의 발음 수에 비해도 3-4배 적은 수이다. 이처럼 동음이의어가 우리 나라에서는 중국에서보다 훨씬 많아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청각성과는 거리가 먼 문언문으로 한자를 수입하게 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 쓰는 한자는 중국보다도 더욱 청각성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에서 한자어가 청각성에 그토록 취약성을 드러내게 된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거기다가 입말 자체가 중국과는 전혀 다른 우리 나라에서 수입물인 한자어는 그저 책 속에서 눈으로나 보고 그 뜻을 파악하는 것으로 그 기능이 축소되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니 청각성을 기대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한자를 접하고 사용하는 사람들도 일부 특권층에 불과한 소수였을 것이니 더욱 입말과는 멀어지게 되었을 것이다. 기미독립선언문처럼 ‘오등은 자에 아’와 같이 전혀 청각성을 고려치 않은 말들이 우리 나라에서 한자를 통해 문서에 쓰여져 왔던 것이다. 우리의 입말과 서로 통일될 것(언문일치)을 아예 포기한 채 쓰여 오던 한자는 20세기 들어와 입말로서도 제 구실을 해야 할 처지가 되자 바로 이 청각성의 덫에 걸리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하는 한글의 기본 소리 가운데에도 ‘갸겨그’같은 한자음에 없는 소리가 있다. 이처럼 우리 나라 한자어는 발음수가 턱없이 적다.
우리 나라의 한자가 청각성을 잃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 나는 우리 나라의 경우 최악의 상태라고 할 정도로 비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한자를 쓰는 한국?중국?일본만 비교해 본다고 해도 이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중국에는 글자마다 고유의 성조(중국 표준어인 북경어[북방어 ; 관화음계]를 기준으로 하면 4가지 성조[1성, 2성, 3성, 4성]가 있고, 그 외에 아직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각종 방언 가운데는 그보다 더 많은 성조를 가진 경우도 적지 않다)라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같은 글자라도 발음 자체가 두 가지 이상의 음으로 발음되는 파음자(破音字)가 발달돼 있다. 예를 들어 파음자의 하나인 ‘大’자의 경우, 원래는 글자 한자만 읽을 때는 ‘따’[d?](성조는 4성)로 발음되지만, ‘大夫’(우리말과 달리 중국어로는 ‘의사’라는 뜻)에서는 ‘따이’[d?i](성조는 4성)로 달리 발음된다. 우리 나라에서도 같은 한자가 두 가지 이상의 음으로 발음되는 경우가 없진 않지만 중국의 파음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중국어에는 파음자가 발달돼 있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한자를 서로 다른 네 가지 성조와 다양한 파음자를 통해 청각성 훼손을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어의 경우도(나는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잘 알진 못하지만) 한자의 경우 같은 글자라도 음독은 물론 훈독으로도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좀더 다양한 발음으로 한자를 읽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한자를 훈독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글자로는 한자를 섞어 쓰더라도 말에서는 일본 토박이말이 그대로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에서는 한자가 가져오는 청각성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발음 체계가 우리 나라보다는 잘 발달돼 있다. 중국은 20세기에 들어와 글자 자체를 번체자에서 간체자로 바꾸고, 발음을 로마자를 변형한 한어병음 표기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으로 중국의 글자를 완전히 표음문자로 바꾸기 위한 과도기로서 취한 정책이다. 중국이 앞으로 과연 처음의 의도대로 간체자까지 버리고 완전한 표음문자국가로 나아갈 것인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그대로 간체자를 쓰는 쪽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처럼 완전 표음문자국가가 되려고 생각하는 배경에는 이처럼 중국어의 청각성(나름대로는 높은 수준의 청각성)이 뒷받침되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흔히 일본은 우리보다 한자를 버리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한자에 대한 청각성에서는 우리 나라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보다 한자를 버리고 완전한 표음문자국(가나만 쓰는 나라)으로 가기가 더 쉽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다만 일본이 한자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표음문자인 가나의 한계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한자어가 한국에서 가장 청각성에 큰 취약점을 드러낸다는 것과, 우리 나라는 가장 뛰어난 표음문자인 한글을 가지고 있다라는 두 가지 점을, 한자를 우리 나라에서 계속 쓸 것인가를 논할 때는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이 정확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러한 추론 과정이나 이론의 타당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우리 나라에서 지금 한자어가 문제되는 것은 바로 이 청각적 취약성 때문임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취약한 청각성 때문에 청각성을 잃은 한자어는 언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으므로 쫓아내 버리자는 것이 한글전용론자들의 태도이고, 이 취약한 청각성 때문에 한자어는 한자로 표기해야 한자의 시각성에 의지해 제대로 언어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한자병용론(또는 한자혼용론; 한자병용론[한자 나란히 쓰기]과 한자혼용론[한자 섞어 쓰기]은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여기서는 둘 다 구별하지 않고 그때그때 병용론으로도 혼용론으로도 쓸 것이다. 모두 한자가 필요하다는 태도이므로)의 기본 태도인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영문자나 한글처럼 소리글자의 경우는 청각성(소리)과 시각성(글꼴) 그리고 의미성(뜻)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말은 본질적으로 청각성만 있고 시각성은 없으며, 시각성은 글자의 단계에 와서야 본질적 요소로 추가되는 것이기 때문에 글자라는 것도 시각성보다는 청각성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글자의 청각성과 시각성을 논할 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청각성과 시각성의 비율이 각각 9 : 1 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이 시각성이 없이 청각성만 가지고도 훌륭히 성립하는 것은 바로 소리라는 것에 인간이 아주 민감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듯이 아주 미세한 차이의 발음이라도 우리는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으로도 설정하고 그것에 의미를 다르게 부여해 말로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와 ‘너’는 아주 가까운 발음이지만 전혀 다른 반대의 뜻을 가리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는 청각성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언어로서 존재할 수 있다(‘도레미파솔라시’라는 7 가지 기본음을 가지고 한도 끝도 없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기적 같은 일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도 이러한 청각의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는 말보다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라는 말이 더 맞는 말이라는 얘기도 있지 않은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한글이 청각성에 비해 시각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시각성을 보완하기 위해 한자를 써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청각성의 무한한 가능성을 과소 평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하나님, 하늘님, 한울님, 부처님, 마음, 뜻, 멋, 슬기, 얼, 넋, 철(없다)’ 같은 추상적인 개념은 물론, ‘서글프다, 애달프다, 미덥다, 상냥하다, 시원하다, 느끼하다, 간지럽다, 알딸딸하다’ 같은 미묘한 감정이나 느낌도 소리로 거뜬히 표현해 낸다. 한자어는 한글만 보아서는 그 뜻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한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말의 청각성을 얕잡아 본 결과다. 480개의 발음밖에 없는 한자어를 굳이 고집함으로써 청각적 변별력을 잃는 단어(동음이의어)를 무더기로 만들어 놓고 그 청각적 변별력을 문제삼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뒤바뀐 느낌이다.

3. 한자어의 청각성 문제
그러면 우리 나라에서 뜻글자인 한자를 쓰면 무엇이 문제인가가 바로 드러난다. 한자를 쓰면 청각성과 시각성의 괴리를 피할 수 없다. 한자는 시각성을 갖추고 있지만 청각성에서 큰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자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 그 뜻을 알 수 있으나(시각성은 확보) 그 글자의 음만 들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알아내기가 어렵게 돼 있다(청각성이 취약). 한자병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바로 이 점에 말미암은 것이다. 우리말에는 들어서는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말(청각성이 결여된 말)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한 청각성이 결여돼서 문제가 되는 말은 거의 다 한자말이라는 점에서 문제는 출발한다. 그것은 소리글자는 청각성을 본질로 하므로 원칙적으로 청각성에 문제를 일으킬 수 없지만 뜻글자는 청각성을 갖춘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우리 나라의 한자는 그 발음수가 480 개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러니 한 가지 발음에 수많은 한자어가 배정될 수밖에 없어, 동음이의어가 무더기로 나올 수밖에 없다. 한자를 사용하면 우리말이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무더기로 나올 수밖에 없고,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문제다. 그런 청각적 변별력을 상실한 말은 사라지는 게 말의 속성상 마땅했다. 그런데 한자는 문서라는 특수한 울타리 속에서 시각성에만 기대어 살아남았다. 살아남았다고는 하나 이미 그것은 참으로 살아남은 것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나질 않았을 뿐이지 이미 말로서는 불구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이런 불구의 말이 문서의 울타리를 벗어나 입말의 세계로 나오게 되자 그 불구상태가 드러난 것뿐이다. 한자어가 오늘날 애물단지가 된 것은 어찌 보면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듣는 즉시 그 말뜻을 알아들어야 능률적이다. 하지만 말을 듣고 나서 다시 머리 속에서 그에 해당하는 한자가 어느 것인가 살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뜻이 이것이구나 하고 확정할 수 있는 한자어들은 그렇질 못하다. 사고의 단계가 한 단계 늘어남으로서 비능률은 필연적이다. 이 피해를 우리는 그저 버릇이 돼서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지, 참으로 대단한 불편이요 비능률이다. 버리자니 아깝고 껴안고 가자니 너무 무겁고. 애물단지 한자어의 비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한자의 청각성은 그 개선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자의 음을 480 개 이상으로 늘릴 수 있는 길은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한자의 장단음을 제대로 구별해 발음하면 조금 나아지겠지만 그것을 국민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이른바 영어나 프랑스말 같은 데서 유래한 외래어가 한자어보다 오히려 문제가 덜된다는 것은 이런 청각성 때문이다. 외래어의 남용은 또 다른 사대주의라는 말도 있듯이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온전히 청각성을 갖춘 말만으로 우리말을 채워 가야 한다는 명제에서 보면 외래어는 한자어보다는 낫다. 외래어는 소리글자에서 나온 것으로서 본질적으로 청각성에 의존하는 말인데다가, 우리말과 청각성에서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말로 수용되는 과정에서 거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자어처럼 청각성을 무시하고 시각성을 무기 삼아 우리말에 무작정 밀고 들어와 우리말을 혼란시키는 일을 적어도 외래어는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앞으로 우리말에서 한글로 써 놓고 그 뜻을 못 알아볼 정도로 청각적 변별력이 떨어지는 말은 우리말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인 청각성(청각적 변별력)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4. 말의 청각성으로 풀어 보는 한글전용론과 한자병용론
우리 나라는 한글전용정책을 추진해 왔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우리말을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공적인 우리말에서 모두 몰아내겠다는 것이다. 매우 무서운 정책이다. 말을 몰아내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으로 가장 궁지에 몰린 말은 한자말일 수밖에 없다. 청각성이 가장 모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자말은 한자이기 때문에 쫓겨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청각성이 없기 때문에 쫓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정확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사기’라는 발음을 가진 한자말은 20 가지가 넘는다.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청각성의 유무는 듣는 사람, 말하는 사람의 지식 정도와 이해력 정도의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한자말의 경우 한자를 잘 아는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청각적 변별력도 높다. 이런 의미에서 한글전용을 전제로 하고 그 보완책으로서 한자를 배우는 것은 한자어의 청각성을 향상시키는 기능은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한자를 병용하거나 혼용하는 것까지 주장하는 것은 이미 본질을 벗어난 것이다. 청각성은 글자와 같은 것을 보지 않고 말소리만을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한자를 배워 한자어의 청각성을 보완하는 것은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하는 꼴이니 불필요한 낭비일 뿐이다. 청각성을 잃으면 예외 없이 쫓겨나는 것이 순리다.) 대체로 ‘사기 치다 할 때의 사기[詐欺]’, ‘사기가 높다 할 때 사기[士氣]’, ‘사기 그릇할 때 사기[沙器]’ ‘사마천이 쓴 역사책 사기[史記]’ 정도가 청각성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청각성을 가진 서너 단어를 제외한 나머지 20 여 가지의 한자말 ‘사기’는 쫓겨날 수밖에 없는 말들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부작용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가 없다. 어떤 (한자)말이 청각성을 상실해 쫓겨나게 되면 그 빈자리를 청각성을 갖춘 새로운 말이 곧 바로 채워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말의 속성(연속성과 지속성, 관습성)으로 인해 재깍재깍 이뤄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나라가 이 단계에 들어와 있다. 예컨대, ‘社旗’ ‘邪氣’ ‘死期’ ‘寺基’ 같은 말들은 우리말에서 쫓겨나게 될 텐데 그 빈자리가 문제이다. 우리는 ‘社旗’라는 뜻으로 ‘사기’라 말할 때 문맥상에서 청각성을 확보할 수 있으면 조금 문제가 덜 되겠으나, 아주 청각성을 상실했을 때는 「회사의 깃발을 의미하는 ‘사기’」라는 식으로 일일이 설명을 해 가며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부작용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거로 되돌아가 한자를 다시 쓰는 것이다. 한자말이 가진 청각성 상실의 취약점을 한자의 시각성으로 다시 보완해서 그 의사소통상의 혼란을 극복해 내는 것이다. 한자병용론 또는 혼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모든 단어나 말은 청각성을 가져야 한다는 대원칙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청각성을 상실한 말은 입말 속에서 늘 부담으로 남아 불편을 일으킨다. 이처럼 청각성을 상실한 말이 끼치는 의사소통상의 불편을 한자를 쓰는 한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한자말의 숙명적인 불행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이 방법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두 번째 방법은 청각성을 상실한 한자말을 청각성을 가진 말로 빨리빨리 바꿔 가는 것이다. 예컨대, ‘社旗’는 ‘회사 깃발’로,  ‘邪氣’는 ‘나쁜 기운’으로, ‘死期’는 ‘죽을 때’로, ‘寺基’는 ‘절터’로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청각성을 가진 새로운 말로 바꾸는 문제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데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쫓겨나는 한자말을 대신하는 새말[갈음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갈음말은 청각성을 확보해야 하고, 쫓겨나는 말이 가졌던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 낼 수 있어야 하며, 우리 국민들의 공감과 합의를 얻어내야 한다. 특히 의미를 고스란히 담아 낸다는 것과 국민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한자를 다시 써서 그 불편의 구덩이로라도 다시 돌아가자는 한자병용론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우리 후손에게 과연 어떤 언어 문화를 물려줄 것인가. 한자라는 굴레는 우리의 역사적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청각성을 상실한 한자말을 계속 끌고 가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어렵더라도 온힘을 쏟아서 한자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완전히 청각성을 갖춘 말들로만 구성된 날개같이 자유로운 언어 문화를 물려줄 것인지.
나는 한자의 굴레를 벗어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자로 인한 우리말의 비극은 이제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한글이라는 우리말에는 더없이 알맞은 우리 글이 있기 때문이다. 한자의 극복은 가능하다. 한글전용이 이뤄 낸 지금까지의 성과로도 그 가능성은 충분히 나타났다. 한글전용은 우리 언어 문화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고 머지않아 그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 한자의 시각성에 기대지 않고도 우리의 생각과 철학을 남김없이 담아 낼 수 있는 한겨레의 말, 시각성과 청각성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이 되는 참다운 말다운 말, 이 자랑스런 겨레말을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의 모든 힘을 한데 모아 아름다운 우리말을 캐내고 갈고 닦아, 말다운 말을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이보다 더 크고 소중한 유산이 어디 있을까.
흔히 영어가 국제어가 된 원인은 역사적으로 긴긴 세월 동안 용광로처럼 그리스어, 라틴어 등 수많은 다른 언어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풍부한 어휘를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말도 한자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좀더 풍부한 언어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논리로 연결시키곤 한다. 그렇다. 말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어휘가 늘어나고 표현이 다양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다른 나라의 어휘를 받아들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넘어서는 안될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자국어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다른 나라 언어의 어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어휘가 자국어와 청각성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되면(외국에서 들어온 말과 자국어가 청각적 변별력이 없이 혼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자국어를 뿌리째 뒤흔들어 혼란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자국어의 주체성까지 위협받게 되어 자국어의 정체성을 잃을 염려까지 있다.
내 생각에 영어가 국제어가 된 이유는 영국이나 미국 등 영어를 쓰는 나라의 국력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영어가 세계를 주름잡게 된 것 또한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일어난 아주 특이한 일일뿐이다. 이른바 ‘세계의 지구촌화’에 따라 일어난 일이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통신 혁명’이 이를 부채질했다. 그런데 영어의 표기 체계는 문자로서 가장 이상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완전한 표음문자로서의 기능을 많은 부분 상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를 쓰는 나라들의 문맹률이 우리보다 높은 이유는 영어의 이러한 표음문자로서의 취약성 때문이다. 영어에서는 소리와 글자간의 1대1 대응 관계가 많이 훼손돼 버렸다. 예컨대 ‘a, c, i ' 같은 글자는 단어에 따라 여러 가지 소리로 발음되기 때문에 완전한 표음성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어가 표음문자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상실한 것은 그리스어나 라틴어 등 다른 나라 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좀더 이상적인 문자 국가로 독일을 들고 싶다. 독일에서는 원래 고유의 문자가 있었지만 불편하다고 보고 로마자를 수용해 쓰고 있다. 독일어만의 특수한 발음을 위해 몇 개의 글자는 로마자를 변형해 새롭게 만드는 등(o 같은 글자) 완벽한 표음문자로서 기능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독일어에서는 발음과 문자 사이에 거의 예외가 없이 1대1 대응이 지켜지고 있다. 이것은 독일이 비교적 최근에 문자 개혁을 단행한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지만(영어는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해 오면서 변해 왔기 때문에 독일과 같이 완전하고 순수한 표음문자로 지켜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문자로서는 이상적인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어에도 그리스어나 라틴어에 뿌리를 박고 있는 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지만, 영어에서와 달리 문자에서 가장 중요한 완벽한 표음성을 해치지 않도록 수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독일인다운 합리적 사고가 빚어낸 결과란 생각이 든다.
완벽한 표음성을 가진 문자를 가지는 것이 문자이상국이 갖출 제일의 조건이라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우리가 한자어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만은 없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자어도 우리말에서 수용되어야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말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한글전용론은 당연한 귀결이다.

Ⅲ. 한자병용론의 근거와 그 검토
한자병용론자들은 한자의 우수성으로 한글의 취약성을 보완하자는 전제하에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국어 생활의 정상화가 가장 핵심적인 주장이고, 나머지들은 부수적인 주장에 해당한다. 그럼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하자.

1. 한자 자체의 우수성으로 한글의 취약점을 보완해 문자이상국을 실현한다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우수한 표음문자이고, 한자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표의문자이므로 이 둘을 다 병행하면 우리 나라는 가장 이상적인 문자사용국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이다. 이상적인 문자는 있을 수 없지만 이상적인 문자사용국은 있을 수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주장이다.
언뜻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론부터 말해 그렇지가 않다. 우리 나라는 세계에 유래가 없는 문자이상국이 아니고 세계에 유래가 없는 이상한 문자국이라고 보아야 한다. 말의 기본 요소인 청각성을 포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나라의 말이 자기 말의 청각성을 잃지 않는 범위 안에서 다른 나라 말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우리말의 청각성을 희생하면서 한자어를 수용하려 한다. 하지만 한자가 한글을 보완한다는 것은 한글의 청각성으로 수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한글과 우리말이 가진 청각성을 넘어서는 범위까지 한자어를 수용함으로써 극심한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이것은 문자이상국이 아니다. 말의 청각성을 잃는 나라가 문자이상국이 될 수는 도저히 없다. 뜻글자와 소리글자의 장점만을 곶감 빼먹듯 쏙 빼다가 우리의 문자생활을 꾸려 갈 수 있다는 달콤한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뜻글자의 장점이 오는 곳에 그 단점도 따라오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잡았던 토끼마저 놓쳐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선 안 된다. 한 나라의 글자는 하나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뜻글자이든 소리글자이든 어쨌든 하나만 써서 불편이 없다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아라비아 숫자는 사실 뜻글자인데도 거의 모든 나라의 공통 글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각 나라의 청각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아주 간단하고 쉽게 숫자를 표기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는 물론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라비아 숫자를 수용한 것은 그 문자가 배우기 쉬우면서도 뛰어난 시각성과 실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1234567890은 ‘하나, 둘, 셋…[또는 일, 이, 삼…]’이나 ‘one, two, three …'에 비해 너무나 간단하고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그 글자를 수용하는 나라의 청각성도 해치지 않았다. ‘1,2,3···’을 우리 나라는 ‘일, 이, 삼 ···’(또는 하나, 둘, 셋 ···) 영어권 국가에서 ‘원, 투우, 쓰리…’같이 자기 나라 청각성을 유지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편리한 글자가 아주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아라비아 숫자(사실은 인도 숫자)는 10 개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의 한자처럼 그 나라의 청각성을 훼손할 뿐 아니라, 복잡하고 어려운 글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리고 한자어는 아무리 간단하고 실용적인 글자라도 우리말의 청각성을 해치지 않을 수 없어서 역시 수용이 곤란하다.
이미 우리의 문자 생활에서 영어 알파벳은 아라비아 숫자처럼 한글과 함께 쓰이고 있는 실정인데(TV, IMF 같이 낱자로서의 알파벳을 가리키는 것이지 television 같은 영어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알파벳도 우리 글자살이에 섞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이것은 이러한 알파벳은 26 자 정도의 적은 수라서 비교적 간단히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편리하게 외래어를 표기할 수 있는 등 실용성이 뛰어나기 때문이기도 하다. ‘에이, 비, 씨…’라고 쓰는 것보다 ‘a, b, c …'라고 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 그리고 영어 알파벳이 한글과 함께 쓰이는 현실을 보고, 영어 알파벳을 우리 글자요 나라글자로 수용해 쓰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자를 우리 글자의 하나로 받아들이려는 한자병용론이나 혼용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얘기다.
한자를 병기하여 한글도 살고 한자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하는 말도 있다. 그러나 한자나 한글을 살리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우리말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다.
그러면 일반적으로 한자의 우수성으로 드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1) 한자의 특성
① 뛰어난 조어력
먼저 한자는 기본적으로 단음절이면서도 함축적이며 심오한 의미를 지닌 특성으로 인해 뛰어난 조어력을 가진다는 것이다. 한자 2,000자 정도만 깨우치면 이들을 조합하여 다양한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전문용어가 거의 한자어로 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라 한다. 이처럼 조어력이 뛰어난 이유는 한자는 기본적으로 한 글자로서 자체 뜻을 가진 단음절어라는 것이다. 즉 함축적이고 의미가 심오한 뜻을 가지면서도 단음절이므로 간단 명료한 용어를 만들기 쉽다는 것이다.
그렇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한 글자마다 고유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표의문자의 특징이다. 그러나 말이 가진 의미성이라는 것은 사실 청각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한자의 조어력이라는 것은 청각성에 이어진 것이 아니라 시각성에 지나치게 치중돼 있기 때문에 동음이의어의 양산을 불가피하게 가져온다. 즉 한자의 조어력은 시각성에 터잡은 것이기 때문에 언어의 진정한 조어력이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은 입말을 전제로 해야 하는 글자의 속성상 글자로서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리고 전문용어가 한자어로 된 이유는 대부분의 용어가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우리가 들여왔기 때문이다. 한자를 쓸 수밖에 없는 역사 속에서 자연히 우리 나라에 들어온 것일 뿐, 한자 자체의 조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용어도 한자어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문용어에 젖어 있는 학자나 지도층에서 관행적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악순환일 뿐이다. 우리는 근대화 과정에서 한자의 신봉국인 일본에게 35년 동안 지배를 받는 등 우리의 주체적인 언어 문화를 키워 갈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우리의 불행한 역사가 초래한 비극 때문에 불가피하게 빚어진 파행적 모습 때문일 뿐이다.
한자어는 근본적으로 청각적 변별력에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한글 전용화를 하게 되면 대부분 사라질 수밖에 없다. ‘사기’의 경우에도 ‘士氣’ ‘詐欺’ ‘沙器’ 같은 의미의 것만 남고 다른 말들은 사라질 것이다. 사기(社旗)는 회사의 깃발, 사기(死期)는 죽을 때로 바뀔 것이다. 이처럼 청각성을 상실한 대부분의 한자말들은 자연히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진정한 조어력은 청각성에 의존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한자보다 수십 배의 발음 수를 자랑하는 한글이 그만큼 조어력이 뛰어나다고 해야 마땅하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사람은 비상한 청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주 조금만 다른 발음으로도 전혀 다른 의미를 나타내는 어휘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수십 만이 넘는 어휘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바로 이러한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결합해 각각의 정확한 뜻과 연결시켜 대화를 거뜬히 해내게 만드는 것이다. 이 능력을 얕잡아 보면 안 된다. 예를 들어 ‘풋’이라는 접두사를 앞에 붙이면 ‘풋고추, 풋사과, 풋나물, 풋마늘, 풋대추, 풋콩’은 물론 더 나아가 ‘풋사랑, 풋바둑, 풋굿, 풋담배, 풋젓, 풋바심, 풋솜씨, 풋윷, 풋잠’이라는 말까지 훌륭히 만들어 낸다. ‘풋’을 하나 더 겹쳐 ‘풋풋하다’하면 정말 풋풋한 냄새, 풋풋한 빛깔을 가진 말이 생겨나지 않는가. 동사 어미 ‘-아’?‘-어’ 아래에 쓰이어 그 동작이 마침내 이루어짐을 나타내는 구실을 하는 ‘내다’도 ‘해 내다, 견디어 내다, 받아 내다, 이겨내다, 알아내다, 찾아내다, 그려내다’와 같이 정말 「끝내 주는」 말들을 만들어 「낸다」. ‘가맣다, 거멓다, 까맣다, 꺼멓다, 검다, 시커멓다’에서  ‘까마스름하다, 까마말쑥하다, 까마무트름하다, 까마반드르하다, 까마족족하다, 까무끄름하다, 까무대대하다, 까무댕댕하다, 까무스름하다, 까무잡잡하다, 까무족족하다, 까무칙칙하다, 까무퇴퇴하다’로, 더 나아가 ‘까마득하다, 까마귀, 까막까치, 까막눈, 까막눈이[문맹자], 까막나라, 까막과부’까지 아주 미묘한 차이까지 낱낱이 실어 낸다. 어찌 우리말의 조어력을 우습게 볼 것인가.
그리고 한자의 조어력 또는 한자의 함축성과 관련해 한자말을 우리말로 옮기면 한자말이 가진 다양하고 풍부한 또는 세밀한 의미가 많이 유실된다고 주장한다. 뜻글자는 시각성이 소리글자에 비해 뛰어나 시각성으로 인한 의미 부여가 좀더 손쉬운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한자말이 토박이말보다 근본적으로 의미가 더 풍부하다고 할 수는 없다. ‘마냥, 그냥’ 같은 말이 깊은 맛이 없는가.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한 단어의 뜻은 여러 문장 속에서 다양한 쓰임을 통해 좀더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를 획득한다. 분명한 것은 어떤 말이 어떤 뜻을 갖느냐는 뜻글자와 소리글자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말 가운데 ‘쌀, 벼, 밥, 나락, 모’(이런 말은 쌀의 원산지인 인디아의 옛말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같은 것은 영어보다 더 발달돼 있는데, 이것은 글자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고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쌀을 주로 먹고  살지만 영어를 쓰는 나라는 밀을 주로 먹는 것이다. 우리 순수한 토박이말도 한자 못지 않게 의미의 함축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멋, 마음, 넋, 얼, 님, 그리움, 사랑, 아픔, 두려움, 흐뭇하다’ 같은 말이 함축성이 없는가. 가장 미세하고 표현하기 힘든 것이 사람의 감정이라고 하는데, 감정의 묘사에서 우리 토박이말을 한자말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한자말을 토박이말로 옳기는 것보다, 토박이말을 한자말로 옮기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른 나라의 말을 자기 나라의 말로 바꾸는 것은 본래가 어려운 것이지 우리말이라고 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나는 산스크리트말로 쓰여진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한역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미의 유실이 있었는가를 알고 있다. 산스크리트말 자체가 그리스말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어휘력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들이 소리글자로 적혀 있다고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뜻글자를 가진 중국어가 어휘력에서 다른 나라보다 뛰어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어는 인도말로 된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중국말 어휘가 2배-5배나 증가하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이에 비해 우리 나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한자말 아닌 우리말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했다. 석보상절 같은 정신을 가진 책이 많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중국이 만들어 놓은 말들을 그대로 들여와 쓰기 바빴다. 아 어찌 슬프지 않으리요.). 그렇지만 한자로 인도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이 가진 세밀한 의미를 도저히 다 담아 낼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경전을 중시하지 않는 선종이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러한 한역 경전의 한계도 한몫 했다. 경전의 번역은 경전의 죽음이라는 말이 있듯이 서로 다른 언어를 온전히 번역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그래서 이슬람교에서는 경전의 번역 자체를 금지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자기 나라의 말은 자기 나라 말로 하는 것이 가장 잘 어울리게 돼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의 생각과 전통도 우리말로 할 때 가장 그 세밀한 것까지 표현할 수 있다. 한자어가 우리 생각을 잘 담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우리 토박이말을 전문 용어나 고급 용어로 활용하려고 제대로 노력조차 해보지 않았다. 언제 우리가 불교 용어를 우리말로 만들려고 제대로 노력해 본 적이 있는가.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자기 말로 소화하려고 자기 말의 2배-5배나 되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낸 중국과 같은 노력을 해 보았나. 티베트는 아예 산스크리트말과 거의 흡사한 글자와 문법까지 새로 만들어 내면서 불교를 받아 들였다. 불교로 인해 티베트는 말의 어휘는 물론 글자까지 얻게 된 것이다. 오늘날 남아 있는 불교 번역 경전 가운데 가장 원본(산스크리트말이나 팔리말)에 충실하고 의미의 유실이 적은 것으로 티베트 경전을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티베트 경전은 원본이 유실된 불교 경전의 복원하는데 첫손으로 꼽히는 제일의 자료이다. 오늘날 티베트가 그토록 두터운 불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떤가. 과거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불교 원전의 우리말 옮김을 진지하게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한역 경전이 훌륭하고 충분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이것은 문화 의식의 문제이다. 자기 말로 소화해 내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문화 의식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처럼 오늘날까지도 우리는 우리 글과 우리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다. 이것이 문화 민족의 모습인가. 나는 우리가 지금이라도 뚜렷한 의지만 있다면, 티베트나 중국이 역사로 보여주었듯이, 불교 경전의 우리말 옮김을 통해 우리말 어휘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힘을 빌어 한글을 널리 퍼뜨리려 했던 세종 큰임금의 정신은 다 어디 갔는가. 석보상절을 통해 우리말과 불교가 다 함께 풍요를 누리는 나라를 만들려 했던 선인들의 꿈은 다 어디에 던져 버렸는가. 지금이라도 우리말의 가능성을 불교에서 꽃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이젠 중국을 통해 일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던 과거가 아니다. 팔리말과 산스크리트말로 된 불교 원전까지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도 한자에 안주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법학계도 과거엔 일본 책으로 서양의 법학을 받아들였지만 이젠 미국, 독일 같은 곳에 직접 법학을 배워 오고 있다. 일본말(특히 한자말)을 통해 서양 법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변질과 왜곡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영어나 독일어를 통해 법학의 본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면서 법학계도 혁명적인 변화를 겪었다. 어찌 법학만 그렇겠는가. 하지만 용어의 왜곡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젠 말까지 바꿀 때가 되었다. 진정한 서양 문화의 수용은 말을 우리 것으로 바꿀 수 있을 때 완성되는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얘기가 옆으로 샜지만, 요컨대 어느 나라의 말이 어는 정도의 어휘를 가지는가는 뜻글자를 쓰는가 소리글자를 쓰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에서는 지나치게 단어의 음절수는 짧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강하다. 과거 종이가 부족하여 되도록 음절수를 줄여 적으려 했던 중국의 영향 때문인데, 바람직한 것이라 볼 수 없다. 우리 나라 사람의 성명도 대개 세 자(성 하나, 이름 둘)로 돼 있는데 서양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너무 짧다. 우리 나라도 한자로 이름을 적기 전에는 네 다섯 자 되는 이름이 많았던 것 같고, 한자로 이름을 적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름은 자연스럽게 길어졌을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예에서 보듯이 앞으로 그들만큼 긴 이름도 많이 나올 것이다(지금 사람 이름은 성을 포함해 여섯 자를 넘지 못하게 법[대법원 규칙]으로 묶여 있다고 들었다. 이름은 본래 여섯 자 넘게 길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행정상 이름이 너무 길면 불편하다는 이유에서라 한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나는 적어도 그 한도가 열 자 정도까진 넓혀져야 한다고 믿는다. 서양 사람들의 이름 가운데 우리말로 보아 여섯 자를 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바바라 스트라이젠드’란 이름을 보라. 그렇다고 그들이 불편을 느끼는가. 이름을 길게 지어도 실제 편하게 사용할 때는 그때그때 줄여서 사용하면 된다. 우리말과 우리 이름은 줄여 쓰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다고 단정하지 말자. 사용할 때 불편하다고 이름 자체를 여섯 자로 묶어 놓는 것은 또 다른 독단이요 문화에 대한 제약이다. 여섯 자 안에서 이름을 지어야 한다면 성을 빼고 나면 다섯 자밖에 안 남는다. 벌써 나는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적어도 열 자는 되어야 마음껏 우리말 이름의 날개를 펼 수 있지 않을까.) 즉 음절수가 간단하다는 것은 분명히 장점이지만 그러나 음절수보다는 청각적 변별력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한자를 안 쓰면 음절수가 늘어나 안 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말이 지나치게 음절수가 적은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글자 살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청각적 변별력이 없는 우리말을 만들고 만 것이다. 청각적 변별력 때문에 중국에서도 이미 구어체인 백화문으로 바꿔 사용하고 있는데, 이 백화문은 기본적으로 한 단어가 두 음절 이상이다. 한자의 단어가 한음절 단위로 돼 있다는 것은 과거의 문언문에나 가능한 것이다.

② 뛰어난 시각성
한자어는 시각성이 뛰어나다는 주장이다. 그렇다. 한자가 시각적 변별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다. 글자의 시각성이란 ‘글자를 보고 그 뜻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글자의 시각성을 이렇게 볼 때, ‘글자가 뜻과 일대일 대응이 될수록, 글자끼리 서로 모양이 다를수록, 글자가 간결할수록’ 시각성이 올라갈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한자는 ‘뜻과 글자의 일대일 대응성’과 ‘글자 모양이 서로 다른 점’에서 뛰어나다. 하지만 ‘글자의 단순성’에선 한참 모자란다. 글자의 간결성에선 오히려 한글이 더 뛰어나다. 그리고 한자의 시각성은 청각성에 대한 손해를 감수하고 얻어낸 것에 불과하다. 글자는 기본적으로 90%의 청각성, 10%의 시각성을 이상적으로 볼 때, 어떤 글자가 아무리 시각성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것은 전체적인 글자의 효능에서 보면 그 비중이 10%를 넘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어떤 글자는 100%의 시각성과 80%의 청각성을 가지고 있고, 또 어떤 글자는 50%의 시각성과 90%의 청각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그 글자의 전체적인 가치는 뒤의 것이 오히려 더 좋다고 해야 한다(완벽한 기능을 하는 글자를 100점으로 볼 때, 앞의 글자는 82점, 뒤의 글자는 86점이 되므로). 그리고 한글이 한자나 로마자에 비해 시각적 변별력에 취약함을 가지고 있으나 그 비중이란 대수롭지 않은 것이며, 앞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다. 그리고 한글의 시각성은 생각한 것만큼 취약한 것이 아니다. 한글의 ㄱㄴㄷ, ㅏㅑㅓ 같은 하나하나는 시각성이 많이 떨어지지만, 한글은 모아쓰기를 하는 특성으로 인해 글자 하나하나는 입체성을 많이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앉’ ‘몫’ ‘넋’ ‘밟’ ‘밝’ ‘닭’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겹받침을 가진 글자는 대부분 그 자체로 뜻글자가 가지는 (의미 고정적) 시각성까지 갖추고 있다.

③ 뛰어난 의미의 고정성
한자는 뜻글자라서 시간적 경과나 공간적 제약을 덜 받고 그 뜻이 고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수천 년 전에도 ‘女’는 ‘계집’을 뜻했고 오늘날도 ‘계집’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女’를 한국?중국?일본에게 각각 달리 발음하고 있지만 ‘계집’이라는 뜻은 다 똑같다는 점이다.
그렇다. 한자는 한 글자마다 그 뜻이 고정되는 힘이 강하다. 그런데 이것은 장점만 가진 것이 아니다. 위의 예에서 ‘녀(女)’가 ‘계집’이라는 의미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에 대해 주의할 점이 있다. 이것은 흔히 간과하는 점인데, ‘女’라는 글자의 형체를 가진 글자는 ‘계집’을 뜻하는 것으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시각성과 의미성의 결합)와 아울러, ‘녀’라는 소리가 ‘계집’이라는 뜻으로 고정돼 있다는 의미(청각성과 의미성의 결합)도 갖고 있다. 즉 ‘녀’라는 발음이 ‘계집’이라는 뜻과 고정되는 관계를 가진다는 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오히려 글자의 가장 큰 기능은 청각성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어떤 글자의 의미 고정성이라는 것도 청각성과 연결된 고정성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각성과 연결되지 않고 의미가 고정되는 우리의 한자 같은 것은 비정상이라 해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녀’라고 할 때 이것이 계집이라는 뜻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사고의 경직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말이란 그 뜻이 하나로 고정될 것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유연성 있게 그때 그때의 필요에 의해 의미를 변화해 갈 것 또한 요구된다. 오늘날 우리는 빠른 생각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다. 고정관념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한자 같은 뜻글자는 그 글자를 처음 만들 때, 그 글자를 만드는 사람의 사상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 당시의 사상은 그 당시에 그곳에서 그 글자를 만든 사람이 타당하다고 본 것일 뿐, 언제 어디서나 진리라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시대마다 달라지는 것이고 달라져야 한다. 글자를 배우면서 그 글자를 만든 사람의 고정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글자는 역사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이 급변하는 세상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한자는 말의 이와 같은 말의 유연성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다. 새로운 개념이 있을 때마다 한자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해 그토록 많은 한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5만 자가 넘는 한자가 있어 왔다. 그것은 이러한 한자의 경직성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고 한자의 고정성으로 인해 시간적 제약과 공간적 제약을 넘어서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큼 큰 장점이 아니라는 것은 실제 부딪쳐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인이 수천 년 전의 문서를 직접 볼 일이 그 무엇인가. 지금 현재 우리말을 어떻게 써서 어떤 문화를 만들어 나갈 것인가가 중요하지 글자의 내용이 고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은 그때그때 사용하는 데 불편이 없을 정도의 의미고정성만 있으면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때 그때의 사명을 다하고 효용이 다하여 사라질 만한 시기가 되면 사라지는 것이 말의 속성이요, 사명이다. 그렇다면 글자의 고정성과 유연성은 청각성에 의해 자연스럽게 입말 속에서 조정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찌 말만이 그럴 것인가. 모든 것이 이와 같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④ 심오한 철학성
한자는 그 글자 자체가 매우 심오한 철학과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이다. 상형문자와 형성문자가 대부분인 한자는 그 글자가 생길 때 매우 철학적인 관념에 의해 상형화되고 형성화되었기 때문에 그 글자를 배우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철학과 역사성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자 속에는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신비한 어떤 것이 들어 있는 듯 말하기도 한다. 붓글씨도 한자로 쓰면 신비한 기가 글자에서 나오고, 부적도 한자로 써야 효험이 있다는 식이다. 한자의 원리를 알면 우주의 법칙, 인생의 진리도 터득할 수 있고, 자연히 인간의 도리도 알게 된다고 말하다. 한자가 마치 도깨비 방망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역술인들은 한자를 좋아하나 보다.
한자는 분명 당시 중국인의 사상과 철학에 의해 생긴 글자이다. 그러나 그 한자에 담긴 철학성이라는 것을 너무 과대하게 보면 안 된다. 한자를 하나 하나 파고 들어가 보라. 그러면 그 글자가 얼마나 초보적인 원리에 기초해 만들어 졌는지 금방 알 수 있다. 한자는 기본적으로 어떤 물체의 생김새를 흉내낸 상형문자에서 출발했다(지사문자 같은 것도 조금 있긴 하지만. 그리고 한자에서 형성문자가 가장 비중이 큰데, 형성자는 이미 있는 글자들을 결합시킨 것이기 때문에 2차적인 글자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형성문자의 대부분도 상형문자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 인(人) 자를 두고 ‘두 사람이 서로 기대면서 살라는 뜻에서 두 획이 서로 기대고 있다’고 엉뚱한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사람의 서 있는 옆모습’을 흉내낸 것뿐이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고 이렇게 토 달기를 좋아한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점은 두 다리로 서는 것과 도구를 손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人’자를 ‘서 있는’ 사람의 팔과 다리를 강조해 글자를 만들었다고. 그렇다. 그것을 부정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너무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한자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개념의 유희에 너무 젖어 있기 때문에, 그 달콤한 맛에 너무 빠져 있기 때문에 말이나 글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자에 담긴 그런 식의 원리는 모든 말에 공통된 것이지 한자나 중국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 ‘사람’만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 왜 ‘사람’이라 이름 붙여졌을까. 따지고 들면 한자를 분석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한 말들을 할 수 있다. 신비하기로 따지고 들면 세상에 신비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마음은 묘하고 신비한 것이야’라고 하지만 몸도 그에 못지 않게 묘하고 신비한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말은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 이상도 도구 이하도 아니다. 말을 보조하기 위해 생긴 글도 또한 마찬가지다. 도구로서 가장 잘 기능하기 위해서 자기가 전달하려는 생각의 가장 특징적인 것을 찾아내 소리(말의 경우)나 모양(글자의 경우)에 담아 낸 것뿐이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우니까 ‘뻐꾸기’란 말이 생겼고, 사람은 사람처럼 생겼으니까 ‘人’자가 생긴 것처럼. 뜻글자를 만든 사람은 무슨 특별한 철학이 더 있어서 글자나 말을 철학적 함축성을 가지도록 말이나 글을 만들고, 소리글자를 쓰는 사람은 그런 철학이 모자라 그런 말과 글자를 만들지 못한 게 아니다. 본질에 차이가 없다. 한자를 분석해 그 속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찾아낼 수 있는 것과 똑 같이, ‘뻐꾸기’란 말을 통해서도 그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낼 수 있다. 왜 ‘뻐꾸기’를 뻐꾸기라고 했을까. ‘까마귀’란 말처럼 겉모양을 흉내낸 말로도 할 수 있었을 틴데. 또 왜 하필이면 ‘뻐꾹 뻐꾹’ ‘운다’고 들었을까. ‘쑥꾹 쑥꾹’ 운다고 들을 수도 있고, ‘뻐꾹 뻐꾹’ ‘웃는다’고 들을 수도 있는데. 이처럼 파고 들어가면 모든 말이 다 그 정도의 정보는 있다. 한자만 특별히 더 이상한 원리가 있는 게 아니다. 말이나 글자란 것이 생각을 담아 내는 도구요 기호로서 고안된 것이므로 그에 필요한 요소만 갖추면 족하다. 그래서 특징적인 몇 가지 점만 뽑아서 소리로 또는 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뿐이다. ‘금강산’이란 말속에 ‘실재 금강산’이 다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실재 금강산을 가리키는 데 필요한 요소[소리(말)와 모양(글자)]만이 들어 있는 것이다. ‘금강산’이란 말속에 ‘실재 금강산’이 몽땅 다 들어 있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이다. 금강산을 보려면 금강산에 가야지 ‘금강산’이라는 말을 붙들고 이리보고 저리 파헤치며 금강산을 찾으려 해서야 될 일인가. 요컨대 말이나 글은 생각을 담아 내는 수단(연결고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한자는 신이나 무슨 신비한 힘이 만든 글자가 아니다.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한자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 있다느니, 우주의 원리가 들어 있다느니 하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이런 환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허위 의식과 미신에 빠져 있는가. 한자의 본질을 똑바로 보라. 껍데기를 벗기고 찬찬히 그 알맹이를 들여다 보라. 그리고 한자의 울타리에서 빠져 나와라. 굳이 신과 같은 존재나 신과 같은 신비한 힘이 있어서 어떤 것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나는 그 신이나 신비한 힘의 작품은 한자 같은 글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자를 만든 과정을 보면 신이나 신비한 어떤 힘이 만들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유치한 방법을 썼다. 신 정도라면 적어도 한글 정도는 되는 글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한글의 ‘ㄱㄴㄷㄹ…, ㅏㅑㅓㅕ…’ 어느 것 하나 신비하게 생기지 않은 게 없다. 이들이 어울려 끝없는 글자를 빚어내는 것은 더욱 신비롭다. ‘캬하’하고 무릎을 안 칠 수가 없다. 그러나 정말 신비한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말)소리다. 소리는 내가 보기에도 신비가 가득하다. 소리는 내 능력을 넘어선 그 어디에선가 온 것 같다. 누가 ‘하나님’하고 부르면 하나님이 달려오시고, ‘옴 마니 빧 메 훔’하면 관세음 보살이 돌아보신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할 정도다. 소리는 신비 그 자체다. 신비한 것을 좋아하는 이여, 정작 신비한 소리는 던져두고 어린애가 만든 것 같은 한자에 정신을 팔고 있는가.
얘기가 샛길로 빠졌지만, 어쨌든 한자가 중국인들의 철학과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그것이 신비한 무엇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렇기 때문에 한자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그 글자에 담긴 철학과 사상을 배울 수 있다는 주장이 가진 위험성에 주목해야 한다. 옛날 사람의 철학이 글자를 배우는 과정에서 그대로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이다. 옛날의 사상(유교적 가치관이 대표적)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고 알맞은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男’자를 ‘밭에 나가 힘써 일하는 사람이 남자’라는 식으로 설명한다면 남자는 밖에서 직장 생활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 주게 된다. 그리고 ‘女’는 그 글자 자체가 ‘두 손을 교차하여 무릎에 두고 꿇어앉은 여자 모습’을 흉내낸 것이라고 보면(실제로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지만[김용옥 님은 아메리카 인디언 여인이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앉아서 애기를 낳는 것에 견주어 여인이 ‘애기를 낳는 모습’을 흉내낸 글자라고 주장한다] 녀(女)자를 설명하면서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실제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한자를 교육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한자의 본래 생길 때의 정확한 철학을 제대로 알고 교육할 수도 없다. 어설픈 한자 실력을 가지고 그 글자에 담긴 뜻을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는 일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여자는 남자에 비해 종속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은연중에 심어 줄 수 있다. 그리고 ‘女’자가 들어간 글자들 가운데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배어 있는 것이 특히 많다. 요즘 서양에서는 남녀를 구별하는 용어 자체를 문제 삼아, 성적 편견이 없는 새로운 말을 만들고 있는 마당인데 말이다.
오늘날 인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큰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역사를 새로 개척해 나가고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새로운 사고와 윤리가 요구되는 사회다. 사상과 윤리는 변해 왔고 또 변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뿐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과거의 고정된 생각에 묶여 있는 글자에 붙들려 있어야 되겠는가. 한글은 소리글자이므로 오히려 이러한 고정된 뜻이나 생각?편견들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열린 글이다. 새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사고를 담아 낼 수 있기 위해선 오히려 한글처럼 열려 있는 글이 바람직하다.
한자를 배우면 예절바르게 된다는 말도 한다. 그 예절이라는 게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인지 나는 궁금하다. 대부분 유교적인 종법질서와 위계질서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리라. 한자를 공부시켰더니 말썽도 안 피우는 점잖은 아이가 됐다고 자랑하기도 한다. 점잖은 아이라…. 아이가 점잖아야 좋은가? 아이는 말썽도 피우고 개구쟁이처럼도 커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말썽도 안 피우고 고분고분한 아이는 어른들이 다루기에 편할 뿐이다. ‘방학 동안에 아이를 서당에 보내 한자를 배우게 했더니 우리 아이가 부모님 말씀 잘 듣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며 다음에도 또 기회가 되면 아이를 서당에 보내야겠다고 말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난 그 집 아이가 불쌍하다. 참교육은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출발이다. 부모나 선생님 입장에서는 자기들의 말을 잘 듣는 다루기 편한 아이가 좋겠지만 그것은 참된 교육이 될 수 없다. 우리 나라처럼 기존의 가치관과 새로운 가치관이 심하게 대립하는 나라에서는 더욱 열린 마음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어른들의 고정관념에 새로운 세대를 묶어 두려는 것은 옳지 않다. 권위적인 위계질서를 유지하는데 맞춰졌던 교육의 목표는 새로운 사고와 새로운 도전 정신을 키워 주는 창의력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참다운 인성 교육도 선진국에서 보듯이 법을 제대로 지키고, 남을 배려하는 민주 시민의 소양을 기르는 데 맞춰져야 한다. 가정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양반과 천민, 남자와 여자와 같은 위계질서를 기초로 했던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가치관만이 참다운 인성 교육일 수 없다.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애인이나 가난한 사람까지도 사람 대접 받고 살 수 있는 선진 민주 이념의 정립이다. 선진국에 비해 우리 나라가 얼마나 도덕성이 뒤떨어져 있는가. 준법 의식과 시민 의식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가. 선진국은 대부분 유교를 배운 나라가 아니고 한자를 아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리보다 도덕성이 뒤떨어진 나라라 볼 수 있는가. 성리학의 이념으로 가득했던 조선시대의 도덕성과 인간성 존중의 수준이 현재의 서구 민주 사회에 비해 높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엄연한 신분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 것인가.
요즘 아이들은 부모나 조부모의 함자도 한자로 제대로 적지 못한다고 개탄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것이 한자를 가르치지 않아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 저 밑바닥엔 이름은 한자로 된 것이 진짜고 한글로 쓴 이름은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의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 이름(이름이 아니라 함자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한 생각은 한자어는 귀한 것이고 우리 토박이말은 천한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터잡은 것인 듯해 받아들이고 싶질 않다.)도 모른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이름은 본질적으로 부르라고 만든 것이다. 이름의 알맹이는 그 소리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한자로 표기했느냐 안 했느냐가 아니다. 홍길동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그것은 홍길동이라는 소리가 그 알맹이고 그것을 한글로 쓰느냐 한자를 쓰느냐는 핵심이 아닌 것이다. 굳이 홍길동이라는 이름에서 그 중요도를 수치로 나타내 본다면 소리가 90%, 글자 표기(한자)가 10% 정도다. 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못 적는 아이들도 한글로는 적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요즘 아이들은 아예 부모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식으로 몰아붙여선 안 된다. 만약 부모의 이름이나 조부모의 이름을 아이들이 알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가르치려 하지 말고(한자로 가르치려 하면 쉽게 그것을 배울 수가 없으므로), 한글로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가르쳐 주면 된다. 그것을 무리하게 한자로 조부모까지 써 보라고 하고 그것을 강요하려 하니 될 수가 없다. 끝내 조부모 이름을 한글로도 재대로 써내지 못하고 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고야 말았다. 한자로 써야 한다는 10%에 불과한 것에 매달리다가, 중요한 90%를 잃고 말았다. 지금부터라도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가르쳐 아이들이 기억할 것을 기대하지 말고, 한글로 할아버지는 홍ㅇㅇ이고 할머니는 이ㅇㅇ이다 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외우라고 하면 친구 이름 외우듯이 쉽게 외울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는데 1분이나 제대로 걸릴 것인가. 이렇게 가르쳐 놓게 되면 누군가 그 조부모의 이름을 물어 보면 ‘할아버지는 홍ㅇㅇ(ㅇ자ㅇ자라고 하거나 간에)이시고, 할머니는 이ㅇㅇ이십니다’라고 똑똑하게 대답하는 아이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됐지 무얼 더 바랄 것인가.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나 조부모의 이름을 아예 모르는 것(따라서 한글로도 쓸 수 없는 것)이 문제이다. 한자로 이름을 쓰게 만들려다가 아예 그 이름조차 부를 수 없게 만드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더 이상 되풀이하지 말아야 하겠다.

⑤ 뛰어난 회화성
한자는 글자가 아름답고 회화성을 가지고 있어 서예 등에 유리하다는 주장이다.
서예에서 한글이 더 아름다운지 한자가 더 아름다운지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과거에 타이완(?)에선가 여러 나라 서예가들이 모여 세계에서 서예에 가장 잘 어울리고 아름다운 글자는 한글이라고 결정했었다고 들었다. 한글은 한자에 비해 간결하면서도 훌륭한 입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글을 잘 지은 건물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한자가 아름답다는 주장 그 밑에는 대개가 밑도 끝도 없는 허위의식이 자리하고 있다. 서예를 좀 한다는 사람도 한글로 글씨를 써 보라고 하면 매우 어려워한다. 한글은 잘 쓰기가 어려워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한자로 쓰면 대강 그리더라도 한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나 또는 잘 아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잘 쓰고 못 쓴 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데, 한글로 쓰며 그 잘 쓰고 못 쓴 것이 누구에게나 환히 드러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있다. 그 만큼 한글은 글쓰는 사람이 허풍을 떨고 싶어도 떨 수 없게 만드는 투명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여러 사회 저명인사들이 신년 휘호니 뭐니 하면서 너도나도 붓을 드는 것을 티비에서 심심찮게 보게 된다. 거의 예외 없이 한자로 글을 쓰는데 그것은 바로 이런 허위 의식이 알게 모르게 한자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한글로 쓰면 금방 들통날 붓글씨 실력을 애써 감추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한자는 그럴듯한 느낌은 주지만 알고 보면 알맹이는 없는, 말 그대로 그럴듯한 것일 뿐이다. 한글서예로 잘 썼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만이 참으로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⑥ 두뇌 계발성
한자를 배우면 두뇌 계발에 좋다는 주장이다. 어떤 한자 교재 광고를 보니 한자를 배우면 논리력, 수리력, 사고력, 창의력을 높여 준다고 적혀 있었다. 한자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어휘력 25.2%, 이해력 22.9%, 사고력 27.5%, 언어능력 10.6%, 인격과 예절성 13.8%가 향상되었다고 구체적인 숫자까지 제시하고 있었다. 한자와 한글은 그 관장하는 뇌 부위가 달라 한자를 배우면 좌우 뇌의 균형적 계발에 좋다는 얘기도 있다.
나는 그러한 통계나 주장이 어느 정도 믿을 만한지 알지 못한다. 머리란 많이 쓸수록 좋아지는 것이니까 한자를 배우면 머리가 좋아질 것이란 생각은 든다. 그러나 그렇다고 머리가 좋아지게 하려고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주장엔 동조할 수 없다. 한자를 알아야만 상상력과 창작력, 수리력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인도 사람들은 한자를 모르고도 불교라는 엄청난 종교를 생각해 내지 않았는가(수리력 또한 인도가 훨씬 뛰어났다. ‘0’이란 개념도 인도에서 처음 생겼다 한다). 한자를 모르는 서양 사람들이 로케트를 쏘아 화성에 가고, 컴퓨터?로보트를 발명해 냈다. 상상력이나 두뇌의 계발은 한자와 어떤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라 볼 수 없다.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여러 방법에 비해 특히 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오히려 한자를 배우느라고 들어가는 부담과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뇌의 발달에 가장 영향이 큰 것은 다양한 음을 기억하고 발음하는 것이란 점이다. 태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청각적 자극이다. 음악은 두뇌 계발에 가장 뛰어난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자음이 발달된 나라 사람(예컨대 서양인)과 모음이 발달된 나라의 사람(예컨대 우리 한국인)은 뇌의 모양은 물론 얼굴의 생김새까지 다르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다양한 발음을 가지고 있는 민족일수록 음감이 뛰어나고 그만큼 머리가 좋다고 한다. 우리 나라 사람이 특히 음악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고 머리가 좋은 것은 바로 우리말이 가진 다양한 색깔의 소리에도 그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소리는 사람의 두뇌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한자어는 480 개의 음밖에 없지만 우리 한글은 그보다 수십 배나 되는 다양한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 실제 우리 토박이말은 한자어의 480 개 발음보다 십여 배 이상 다양한 발음을 사용해 구성돼 있다. 우리 토박이말을 많이 쓰면 두뇌의 발달에 더 좋은 영향을 가져오는 것이다.
한자말은 소리를 들은 다음 그 글자꼴을 머리에 떠올려 본 다음 그 뜻을 정확히 찾아내는 구조로 돼 있어 생각의 깊이를 더해 준다는 주장도 있는데, 그것은 사서 고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한자어처럼 두뇌에서 글자를 떠올리는 과정을 더 거치는 것은 언어생활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한 원인이 될 뿐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을 매끄럽게 줄줄 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이러한 원인도 하나 있을 것이다. 꼭 머리가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음악이나 미술, 수학 등 정통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머리가 좋아지기 위해 한자를 배워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 번지수가 바뀐 느낌이다.
그러면 이번엔 한글에 대해 알아보자. 한글은 무슨 장점이 있을까.

(2) 한글의 특성
① 편리성
우선 쉽고 편리한 글자다. 배우기 쉽고, 쓰기도 쉽다. 컴퓨터 등 전산화에도 매우 적합하다. 전산화에서 한글은 영문자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자는 배우기도 불편하고 쓰기도 불편할 뿐 아니라 전산화에도 매우 불편하다. 전산 소프트웨어의 개발로 한자의 전산화가 다소 나아지고 있으나 지나치게 많은 메모리를 잡아먹고, 또한 근본적으로 자판으로 쉽게 구현할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한자의 전산화가 조금 진전된 것은 한자의 시각성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청각성에 의지한 결과다. 예를 들어 ‘烏飛梨落’이라는 한자를 전산화하기 위해선 ‘오비이락’이라는 소리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 한자 자체의 시각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자어의 이러한 문제점은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할 정도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오죽하면 일본이 전산화에서 뒤 처진 가장 큰 이유가 한자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나오겠는가.
그렇더라도 한자도 편리한 글자라는 주장이 있다. 한자는 배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한번 배워 놓기만 하면 활용하는 단계에서는 오히려 편리하다는 주장이다. 풍부한 조어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조어력에서 한글이 한자보다 뛰어나다는 점을 되새겨 본다면 근거 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전산화처럼 실제 응용 부분에서도 한글이 우수한 것을 보면 한글은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 응용에도 편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홀소리와 닿소리의 결합에 의해 무한히 많은 글자와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구조적인 과학성 때문이다. 컴퓨터가 0과 1이라는 두 개 의 조합만으로(컴퓨터는 2진수를 사용) 그 엄청난 일들을 척척 해내고 있는 것과, 음악에서 7 가지의 기본음을 조합해 한도 끝도 없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보듯이 이런 조합의 과학성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한글은 기본적으로 유연하고 열려 있는 글자이다. 따라서 어떤 상황에도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이다.
② 다양한 발음의 표기성
한글은 수많은 발음을 적어 낼 수 있다. 즉 청각성에 탁월한 글자이다. 오늘날 우리 나라 말 가운데 적어 내지 못하는 발음이 한글에는 원칙적으로 없다(긴소리 표기 등 몇 가지가 있긴 하다). 지금 최소한 11,172자를 구현할 수 있다. 한 글자만 똑 떼서 발음했을 때 발음이 서로 겹치는 것(‘안, 앉, 않’ 같은 것)은 하나로 계산하더라도 최소한 3,024 음을 표현해 낼 수 있다(그러나 뒤에 ‘-아’같은 홀소리가 붙으면 ‘안아[아나], 앉아[안자]’, 않아[안하]’처럼 서로 달리 소리나기 때문에 이들의 본디 소릿값이 똑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또 ‘안, 앉, 않’이 소리는 ‘[안]’ 하나로 나지만 그 글자의 시각적 차이로 인해 ‘앉’은 ‘앉다’라는 뜻이고, ‘않’은 ‘아니하다’의 뜻임을 알 수 있다. 90%의 청각성과 10%의 시각성이라는 글자의 이상적 비율이 한글에서 절묘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리는 두 개만 결합시켜도 계산상으로 1,944,576 개(=3,024×3,024)의 청각적 변별력을 가진 두 음절 말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엄청나지 않은가. 이 가운데 실제 1%만 골라 사용해도 소리가 뚜렷이 구별되는 10만 단어 이상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한글을 좀더 갈고 다듬어 간다면 더 많은 글자를 구현할 수 있다. 한글은 지금도 끝없이 발전할 수 있는 글자인 것이다. 이 문제는 다음에 더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자는 어떤가. 한자는 480 개의 음밖에 없다. 상용한자를 2,000자로 할 때 평균 한 음에 5 개 한자가 배당되는 것인데, 어떤 음은 10 개 이상의 한자가 한 음에 배당된다(만약 법률이나 의학, 불교 같은 전문분야에서 쓰이는 한자까지 포함해 약 5,000자 정도와 대비시킨다면 그 비율은 그만큼 더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이러니 청각적 변별력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한자병용론자들이 한자의 시각성으로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자고 그렇게 한자의 병용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인데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그래도 4성(1성, 2성, 3성, 4성)이라는 성조가 있고 파음자가 많아 청각적 변별력의 문제가 우리보다는 덜 심각한 편이다. 중국어의 409 개의 기본성음이 각각 4성을 가진다고 볼 때 중국어는 1,636 개의 음을 가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대개 중국에서는 4,000-5,000자 정도의 한자를 교양인이 사용하고 있다고 보면 한 음마다 대개 3 개 정도의 한자가 배당되는 셈이다. 일본에서도 기본적인 음이 301 개에 불과하지만 한자어를 음독은 물론 훈독도 함으로써 우리보다 다양한 한자 발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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