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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직장”
기사 입력 2013-11-04 15:08:33  

(집체호 식구들)

직장을 갖고 있으면 직장인이다. 몸 담고 있는 곳이 직장이라면 나도 직장을 여러번 바꾸었다. 중국의 근무년한 규정에 따르면 나의 첫 직장은 “광활한 천지”다. 왜냐하면 당시 농촌으로 간 지식청년은 귀향지식청년과 달리 농촌에 간 그날부터 근무년한이 시작된다.  첫 “직장”은 참으로 거창한 “직장”이였다. 당시 유행된 말로 간추리면 “광활한 천지”라고 이름지은 나의 첫 “직장”은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보고” 호미로 땅을 긁으면서도 “지구를 다스리는” 곳이였다. 그렇게 3년반을 “세계를 내다보며 지구를 다스렸다”

그담 이어진 “직장”은 꿈많던 학창시절이였다.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마치고 배치받은 곳은 연길현문공단(후엔 룡정시예술단이라고 명칭) 창작실이였다. 그 뒤로 북경영화학원 시나리오작가반, 연변문예창작실, 연변텔레비전방송국을 전전하다가 지금의중국국제방송국에 눌러앉았다.

15살에 “직장인”으로 사회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난 나 자신을직장인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별로 없다. 직장인이라면 우선 직장인으로서의 긍지감이 있을거고 잇따라 따라오는것이 수없이 겪게되는 갈등과 고뇌, 거기에 겹치는 가정, 명예, 승진 등등 요인으로 받게되는 스트레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상술한 직장인으로서 받아야 할 그런 갈등,고뇌, 스트레스를 별로 받지 않고 말하자면 “멋대로” 살아왔기에 나 자신을 직장인 계열에 세우고 싶지않다. 한것은 나에겐 또 다른 나로서의 “직장”이 있었기 때문. 그 직장이 바로 작가로서의 “직장”이다.

15살에 어쩔수없이 몸담게 된 “광활한 천지”는 나의 처녀작이 “탄생”한 곳이다. 당시 아버님은 “반동학술권위”, “간첩” 루명을 쓰고 수감돼 있었고 난 “개자식”으로 몰려 농촌에 가서도 당시 그 많던 회의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그냥 수걱수걱 일만 했다. 밭갈이부터 김매기, 후치질, 가을걷이, 겨울엔 소 사양원, 못해본 일이 없었고 어느 한해는 내가 최고 공수를 벌었다. 405공, 그러나 한 공에 38전, 그것도 현금이 없어 그냥 장부책에만 기록만 되였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하늘의 별만 쳐다 보고, 그러다가 어쩌다 쓴 글이 소 사양원이 어떻게 소를 잘 키워 생산대의 살림을 한몫 떠멘다는 시같지도 않은 시였다. 생각밖에도 그 시가 1972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문화혁명기간 처음으로 펴낸 시집 “태양의 빛발아래”에 수록되여 나의 창작생애에서 처녀작으로 된것이다.

연변대학 학창시절은 작가의 꿈을 꾸던 시절이였다. 그러나 당시 작가는 “고린내나는 아홉째”에 속했다. 첫 학기를 마치며 한반에 있는 학우와 술 한잔 나누면서 난 후에 작가가 될거야 하고 했는데 그 학우가 내 말을 선생님한테 “회보(고자질)”했다. 그 이튿날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이 이랬다.

“우리 반에 아직도 자산계급 명리사상에 물젖어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는 학생이 있는데 그 학생은 자아반성을 잘해야 될것 같소.” 당시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버님은 나에게 “작가는 항상 먼저 얻어맞는 사람이기에 절대 작가가 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사내가 한번 칼을 빼들었으면 잡초라도 베라”는 말과 같이 나는 “한번 빼든 칼”을 휘둘러 보기로 결단했다. 지금도 이 말은 나에게는 좌우명이다.
  

연변대학 학우들(1973년)

어쨌든간 대학에서 작가가 될 꿈을 무르익혔고 그 꿈을 현실로되게 한 곳이 연길현문공단이였다. 가사, 연극, 소설에 두각을 내밀었는데 당시 최고의 히트작은 연극 “두부장사”, “시름거리 웃음거리”, “울고웃는 사람들”이였다. 단막극 “두부장사”는 제1회 연변연극제 1등상을 수상했고 장막연극 “시름거리 웃음거리”는 수상은 물론 당시 공연차수에서 사상최고를 기록했다. 연길현문공단은 나에겐 명실공히 작가의 첫 “직장”이였다.

그후로 나의 작가생애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일년에 집에있는 시간이 명절까지 합해서 두달 밖에 안되였다. 온 사회가 나의 무대였고 모든 사람들이 나의 주인공이였다. 사회 전체가 나의 “직장”이 된것이다. 중국 전역에서 티베트와 해남도를 내놓고 거이 다 “답사”했다. 얼마나 나돌아 다녔으면 나의 안해가 “난 생과부와 같아”라고 했을가.
  

연변대학 출신 원로작가님들과 (조성일, 김태갑, 리상각)함께

사실 나의 안해는 내 작품의 첫 독자, 아니 “검열관”이다. 작품을 발표하기 전에 나는 무조건 안해한테 작품 “검열”을 맡긴다.안해가 “괜찮아” 하면 그 작품은 꼭 “해빛”을 봤다. 헌데 딱 한번 안해의 판단이 빗나갔다.

중국국제방송국에 전근된후 10년동안 필을 놓았다가 다시 들어 쓴 소설이 “또 하나의 나”였다. 처음으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쓴 소설이기도 하다. 새벽녘까지 자판을 두드리다가 잠간 잠을 청했는데 눈을 뜨니 안해가 컴퓨터앞에 앉아 내가 쓰고 있던 소설을 보고있었다.

“어때?” 내가 물었다.

여느때 같으면 “괜찮아”해야 할 안해가 하는 말. “당신 오랫동안 필을 놓아서 그런지 흐름이 좀은 이상하네요.”

당연히 다를수 밖에. 북경에 전근되여 10년동안 소설작품을 발표하지 않았지만 항상 현대소설의 흐름을 읽으면서 재래의 “나”를 탈피하고 “또 하나의 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모지름을 써왔던것이다. 그 소설이 나중엔 “윤동주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당시 윤동주문학상 평심위원이였던 김호웅교수는 나의 작품평을이렇게 했다.

“‘서울양반’이 된 김훈씨가 드바쁜 북경인의 일상에 빠져 영영 사라지는가 했더니 요즘 ‘또 하나의 나’, ‘수도권의 촌놈들’, ‘거미의 이야기’, ‘수렁 속 깊은 곳에’, ‘마지막 한 수’ 등 단편들을 연거푸 펴내고 있다. 하여 원고난에 허덕이는 우리 문학지의 편집인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또 하나의 나’는 현시대 중국사회의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 실업인구의 증대와 그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인간의 고뇌와 사회의 불안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만큼 우리는 우선 김훈 씨의 작가적 사명감과 치열한 현실 참여의식을 긍정해야 할 것이다.”



남들 눈에는 작가란 아주 ”자유분방”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지만사실 작가에겐 고충과 비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장막연극 “망각된 인간들”을 실례로 든다.

1987년 연변연극단에서 무대에 올린 이 연극은 정신병원이라는 특이한 환경을 배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환자와 정상인이지만 정신질환을 가진 일반인들의 운명과 흘러온 세월이 인간에게 강요한 정신질환, 아울러 정신질환이 정상인, 사회에 조성한 위해를 각광시키면서 물질의 풍요만 추구하지 말고 심령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것을 호소한 작품이다.

이 연극은 3회 공연밖에 못하고 금연당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11년이 지난 1987년이었지만 “좌경” 사조는 남아있었다. 당시 이 연극에 “사회 전체를 정신병원으로 모독하고 현대인을 죄다 정신병환자로 치부했다”는 루명을 뒤집어 씌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극은 그 이듬해 “중국소수민족제재연극창작” 은상을 수상했다. 이 연극을 연극 평론가들은 “김훈의 연극에서 가장 연극다운 연극”이라고 평했고 “중국연극진흥상”까지 안겨주었다.

예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직장”에도 “색안경”을 쓴 “상사”의 독단이 있다. 그런 “상사”의 독단에 머리를 수그린다면 작가가 아니다. 그때 내가 한 말은 이랬다.

“연극을 금연시키고 내 공직까지 박탈할 수 있지만 단 한가지만은 박탈할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 손에 쥐여진 필입니다. 말하자면 작가의 권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