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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찾아서] 림금산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부장의 조선족학교 취재기
기사 입력 2014-03-06 00:10:22  

림금산. 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부위원장, (사)연변시가학회 부회장, 중국조선족소년보사 기자부 부장, 시집, 동시집 등 다수
연변지용문학상, 해란강문학상, 두아동문학상, 윤정석아동문학상 등 다수 수상연변작가협회 시가창작위원회 부위원장, (사)연변시가학회 부회장


그애들의 까아만 눈동자를 찾아서    

내가 어린이신문사에서 기자노릇을 한지도 어언 27년이 된다. 그간 동북삼성 광활한 대지를 주름잡으며 취재길에서 흘린 땀방울은 얼마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 험난하고 행복했던 취재길에서 늘 내 마음속에서 고패치며 잊혀지지 않는 일들이 자꾸 추억의 물결을 타고 파문을 일구며 나의 가슴벽을 철썩철썩 때린다. 그때마다 나는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멀리 눈주어 밤하늘을 바라본다 그러면 밤하늘의 여물어가는 별무리들이 마치 내가 만났던 별처럼 많은 우리 민족학교들의 창가처럼 반짝반짝 빛을 뿌린다…그 창문속에는 초롱초롱 별처럼 빛나는 우리 민족 애들이 한가득 모여앉아 ㄱㄴㄷㄹ…를 배운다.

그 창문속에는 아빠,엄마가 멀리 돈벌이를 떠나 그리움의 눈물을 흘리는 애들이 한가득 모여앉아 친인의 정을 목마르게 기다린다. 그 창문속에는 부모가 리혼하여 부모없는 애들이 한가득 모여앉아 어미잃은 송아지처럼 음매- 음매- 울고있다…


#1. 홍덕학교의 대문가에서

몇년전 나는 취재차 흑룡강성 오상시의 한 자그마한 학교로 찾아갔다. 오상에서도 한 30여리 달려가서야 겨우 찾을수 있는 자그마한 조선족학교였다.

학교의 간판을 훑어보니 “홍덕조선족소학교”라고 씌여있었다. 헌데 학교대문은 잠겨있었다. 내가 전달실을 들여다 보니 전달실은 누구도 없이 텅 비여있었는데 유리창은 몇년은 닦지않은 듯 먼지가 손등만하게 뚜껍게 달라붙어 있었다. 내옆엔 몇몇 학부모들이 애들을 기다리며 서있었고 한쪽으로 좀 치우쳐 웬 한족로인이 왔다갔다 서성이고 있었다. 찬바람에 몸을 옹송그린 한족로인은 또 한쪽 다리를 살록살록 절고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 처음 오는지라 그 한족로인한테 말을 걸었다. 그분은 올해 86세인데 손주마중을 왔단다. 로인의 말이 이 학교에는 지금 20여명의 학생들이 있는데 그것도 태반이 한족학생이란다. 그리고 이 학교는 몇년전 벌써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인데 이 부근에서 기업을 꾸리는 조선족기업가 림홍덕경리가 후원하여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단다. 로인은 하학하는 손주를 데리러 왔는데 조금 있으면 상과가 끝나 나온단다. 내가 왜 손주를 조선족학교에 붙였는가고 묻자 로인은 어줍게 웃으며 자기의 손주는 한족애도 조선족애도 아니란다. 자기는 지금 조선족안로인과 함께 살고있는데 안로인도 올해 80세란다. 아들또한 조선족여성과 결혼하여 이 애를 낳았고 아들며느리가 리혼하게 되자 리혼한 며느리는 한국에 나가고 아들은 남방으로 돈벌러 떠나면서 손주를 자기네한테 맡겼단다…이렇게 말하는 로인은 긴 한숨을 쉬면서 얼굴에 착잡한 표정을 짖는 것이였다.
갑자기 하늘이 시꺼멓게 흐려지더니 이윽고 진눈까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늦가을의 스산한 날씨에 나는 오싹 몸을 떨었다.

조금후 한 교원인듯한 분이 애들 여럿을 이끌고 학교현관으로부터 나오더니 대문 께로 와서 철대문에 잠겨진 큼직한 자물쇠를 열어주었다. 그 한족로인의 손주가 류창한 한어말로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매달린다. 로인은 품속에서 비닐봉지에 정히 싼 밀가루 만두를 꺼내서는 손주한테 건네준다. 그애는 배가 고팠던지 그걸 받아 비닐봉지를 헤치고 급급히 먹어대기 시작한다. 로인은 나한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건네고는 손주애의 손을 잡고 눈바람속으로 걸어간다. 한쪽다리를 살록살록 저는 로인과 손주애의 뒤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는 나는 불시에 코마루가 찡- 해남을 어찌할수가 없었다.


#2. 사라져버린 학교

10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상지시를 떠나 동경성쪽으로 차고삐를 돌렸다. 해빛이 호듯호듯 떨어지는 운동장에서 깔깔대며 뛰놀던 성동향중심소학교랑 우창소학교랑 그리고 발해소학교와 향수소학교랑 그냥 그자리에 있을가?

나는 이번 취재길의 마지막 역으로 녕안시동경성진 성동향 조선족중심소학교를 찾았다. 새건물들이 수없이 많이 일떠서 옛적의 길은 찾을래야 찾을수가 없었다. 헌데 길손들과 물어물어 겨우 찾은 이 학교 옛터는 이미 쑥밭으로 무성하고 학교는 다른데로 이사했는데 학생이  11명밖에 안된단다.

나의 눈앞에는 이 학교에 아직도 200여명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던 10여년전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이 학교는 이상하게도 창문마다 널문을 해서 달았었는데 낮에는 광선때문에 널문을 열어젖히고 상학하고 저녁이면 널문을 꽁꽁 닫아걸어놓고 있었다.

교장한테 원인을 물으니 저녁마다 술취한 사회청년들이 학교부근에 와서 돌총을 놓아 유리창을 다 마사버린단다. 아무런 리유도없이 그저 재미로 그런단다.

조치를 대다 못해 나중엔 창문마다 널문을 다는 방법아닌 방법을 찾아낸 것이란다

나는 그때 억이 막혔다. 널문을 단 교실남쪽창문과 북쪽창문을 세여보니 200여개나 되였다.

그때 운동장에는 또 옆의 목재가공공장에서 실어다 놓은 통나무가 여기저기에 무너져 있어 아이들의 활동장소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헌데 그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의악스레 우리말로 공부하던 애들이 지금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마당은 온통 쑥대밭이 되였고 교실들은 이미 다 헐망한대로 목재가공공장의 창고로 되여버렸다. 창고앞엔 혀를 반쯤이나 내두루고 헐떡이며 이쪽 저쪽 갈개는 황둥개 한마리가 주인을 믿고 얄개고 있었다.

나는 억이 막혔다. 민족학교의 소실속도가 이토록 빠를수가 있는가? 당시 이 학교 부근 어느 촌소에서 교원사업을 했던 리창욱선생도 나와 동행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우창소학교, 향수소학교랑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발해소학교는 지금 학생이 40여명밖에 없는데 원래의 성동향중심소학교는 지금 11명학생밖에 안남아 한족학교와 합병했단다. 그도 가슴이 아파 연신 한숨만 쉬는 것이였다. 나는 사진기를 꺼내 목에 쇠사슬을 감고 코수염을 기른 한족주인과 함께 학교를 지켜서있는 황둥개와 그 뒤의 스산한 학교건물을 한 장 찍고는 손이 말을 듣지 않아 더 찍지 못했다.

우리는 아쉬웁고 무거운 마음을 안은채 한때는 700여명학생이 왁짝거렸다는 성동중심소학교 옛터를 떠났다…


#3. 한밤중 이불을 쓰고 앉아

흑룡강성 오상시 두가진 조선족소학교에 찾아간 것은 이미 10여년 전의 일이다.

취재가 끝나자 도수높은 안경을 건 교장선생님이 자기집에 나를 초대했다. 그날따라 잔잔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술 둬병을 사들고 교장댁에 들어섰더니 완전 한족구들이였다.

거의 한 메터 정도는 높은 구들우에 올라가 앉았다. 교장부인이 물만두를 해놓고 살갑게 굴었다. 한창 도수높은 배갈에 맛좋은 물만두를 먹는데 난데 없던 황둥개 한마리가 반쯤 열린 문으로 들어와 바로 나의 아래 바닥에 앉는다.

풍채좋은 황동개는 내가 먹는 물만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헌데 비에 함빡이 털을 젖힌 개의 몸에서 비린내가 확-확- 풍겨 나의 음식그릇에 매달린다. 워낙 나는 이런 걸 별로 탓하지 않는 타입이지만 그날따라 비를 맞은 황둥개의 몸에서 풍기는 비린내는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토할 뻔하는 걸 겨우 참아냈다. 물론 물만두는 반쯤밖에 먹지 못했다. 하지만 흰반창고를 붙인 안경다리를 자꾸 추슬리면서 교장선생님은 학교의 정황을 도도하게 풀어놓는다. 나는 너무도 열정적인 교장의 접대에 깊이 감동되였다.

이튿날에는 이웃마을인 룡봉산소학교로 찾아갔다. 취재를 마치고 저녁까지 대접받으니 이미 이슥한 저녁이였다. 하루밤 묵어야겠는데 온 마을에 여관집으로 쓰는 개인 “여인숙”이 한집밖에 없단다. 물론 한족집이였다. 나는 그런대로 피곤기가 갈마들어 옷도 벗지못한채 이불을 덮고 꿈나라로 들어갔다…헌데 한창 잠을 자다가 신문지로 도배한 천정에서 뭔가 툭-하고 나의 발치에 떨어진다. 나는 화닥닥 놀라 불을켰다. 헌데 한뼘을 퍽 넘을만한 쥐한마리가 이불우에서 어질어질 기여간다. 나는 머리끼가 쭈볏하고 일어섰다…쥐는 눈을 뙤록거리더니 그냥 기여서 바닥을 내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쥐가 떨어진 자리에 구멍이 펑- 뚫려 싯누런 신문지가 펄럭이고 있었다. 나는 정신이 팔짝 들어 더는 잠들수가 없었다. (이제 쥐 한 마리가 더 떨어지면 어쩌나?) 나는 저으기 겁이 났다. 그래서 아예 잠자는걸 단념하고 이불을 쓰고 꼬박 다섯시간이나 앉아버티다가 날이 희끄무레 밝자 그 “여인숙”을 빠져나왔다….


동포세계신문(友好网報) 제311호 2014년 2월 27일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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